주간동아 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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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앞설 수밖에 없는 투견장 사회

나홍진 감독의 ‘황해’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1-01-03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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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이 앞설 수밖에 없는 투견장 사회
    크리스마스이브에 영화 ‘황해’를 보았다. 러닝타임 2시간 반. 계속되는 폭력, 핏빛 바다, 지옥도의 사회. 2010년 한국 영화의 현주소가 영화 ‘황해’에 집결돼 있었다. 피폐해진 영혼과 걸신들린 악귀가 득실거리며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거두어버리는 곳. 결국 괴물은 공권력의 망에 걸리지 않고, 이 땅의 낮고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며 죽어간다.

    ‘황해’의 주인공 이름은 구남이다. 개 구(狗)에 사내 남(男)자가 연상되는 이름. 그런데 영화에 유일하게 삽입된 내레이션이 개병, 즉 광견병 이야기고 도박판과 개시장 장면이 영화의 문을 연다. 광견병에 걸린 개가 제 어미를 물어 죽인 후, 아가리로 물 수 있는 건 모조리 물어 죽였으나 결국 동네 사람들에게 쫓겨 서서히 죽었다는 것. 구남은 개를 뒷동산에 묻어주었지만, 그날 어른들이 다시 꺼내 먹었다고 한다.

    그렇다. 영화 ‘황해’의 세상은 거대한 투견장이다. 남자들은 서로를 물고 뜯고 살육하고 도륙한다. 왜? 오직 살기 위해서다. 조선족인 구남은 아내를 서울에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거금을 빌렸다. 아내는 6개월째 감감무소식이고, 그는 밤마다 딴 남자 품에 안긴 알몸의 아내를 꿈에서 본다. 돈, 여자, 자식. 나홍진 감독이 요약하는 남자들의 유일한 강박과 근심거리. 구남은 이 셋 모두를 지녔다.

    그래서 구남은 바다 건너 누런 바다 ‘황해’를 건너온다. 서쪽 바다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집어삼키고 넘실거리는 거대한 죽음의 구렁텅이,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다. 구남을 고용한 자는 조선족 개장수인 면정학. 그의 말만 믿고 단돈 50만 원에 논현동의 어떤 남자를 죽이러 왔는데. 어라, 이 남자는 자신의 운전사 손에 죽임을 당하고, 구남은 엉뚱하게 살인자 누명을 쓰고 경찰에 쫓긴다.

    이후 1시간 30분 동안 영화는 개싸움 벌이는 남정네들의 아수라장으로 채워진다. 스패너, 망치, 칼 심지어 개뼈다귀를 써서라도 서로를 죽여야만 사는 누런 바다에 피 칠갑이다. 나 감독은 구남과 면정학의 대결 구도에 또 다른 용의자 김태원 사장을 끼워 넣으면서 플롯을 복층화한다. 폭력의 먹이사슬 최하층에 있는 조선족 남자의 강박과 오해를 중심축으로 사내들의 자멸극이 소용돌이치며, 더 많은 피와 더 많은 폭발과 더 많은 액션으로 몸집을 불린다.



    가만히 앉아 영화에 들어간 자금과 인력, 플롯을 가늠해보면 두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자원이 투입됐다. 그런데 이 누아르엔 유머도 팜므파탈의 유혹도 없다. 직설화법의 기나긴 액션신은 중반부까지 유지하던 구남의 배후에 대한 스토리의 동력(관객의 궁금증)을 조금씩 갉아먹어 결국 자동차 액션이라는 과잉의 에너지로 소진되고 만다. 놀라운 데뷔작이자 스릴러인 ‘추격자’에서 보여준 나 감독 특유의 칼날 같은 편집과 컷 나누기의 힘은 여전하지만, ‘황해’는 여러모로 보아 2년 차 감독의 증후군을 벗어나지 못했다. 감독의 자의식이 확장되면서, 더 많은 내용과 형식을 실험하다 결국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것.

    이러한 면에서 ‘황해’는 사실주의란 비평적 찬사에도 ‘정말 감독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이 지옥이 사실인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정우와 김윤석의 날것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지만, 2시간 30분 동안 영화에 압도당하기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후렴구에 피로감마저 느낀다.

    사실 2010년 대한민국 관객들은 너무 많은 악마를 스크린에서 만났다. 너무 많은 폭력의 정글을 헤매고 다녔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위해 겹겹이 둘러싼 복층 플롯은 아무리 보아도 감독의 자의식이 낳은 과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이런 날것의 폭력을 연인과 함께하라고 개봉한 영화를 보다 보면, 2010년 한국 스릴러에 거의 없었던 관객에 대한 배려와 소통 의지가 ‘황해’에도 역시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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