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2

2010.11.15

큰소리 치는 참전, 잊으려 하는 참전

中 시진핑 “항미원조전은 정의” 파문…한국은 베트남戰 변변한 행사도 없어

  • 이정훈 논설위원 hoon@donga.com

    입력2010-11-15 0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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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소리 치는 참전, 잊으려 하는 참전

    신의주 건너편에 있는 중국 단둥에는 중국군의 6·25전쟁 참가를 기념하는 항미원조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6·25전쟁 때 선두로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 13병단 사령부 터에 53m 높이로 세워졌다.

    10월 25일 베이징에서 열린 항미원조전(抗美援朝戰·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한 전쟁) 좌담회에서 유력한 중국의 차기 대권 후보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항미원조전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발언해 큰 파문이 일었다.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것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중국을 침략한 미국을 물리친 정의로운 전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겨버리려 한다. 마치 대한민국 전체가 ‘중국 포비아(phobia·심리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에 걸린 듯하다.

    중국이 말하는 항미원조전이란 무엇인가. 중국군의 ‘병단(兵團)’은 우리 육군의 1군, 3군과 같은 야전군에 해당한다. 6·25전쟁 때 중국군은 한반도에 5개 병단을 순차적으로 투입해 북한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이 두려웠는지 중국군이 정식으로 참전하는 형식을 택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북한을 돕기 위해 싸우러 가는’ 식으로 참전했다. 개인이 모여서 만든 군대를 ‘의용군(義勇軍)’이라고 하는데, 중국군은 의용군 형식으로 참전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군대는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인민지원군’으로 불렸다.

    펑더화이(彭悳懷)가 이끌던 인민지원군의 선봉이 13병단이다. 13병단은 신의주 건너편 압록강변 단둥(丹東)에 모였다가 한반도로 들어왔다. 압록강 도하(渡河)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이들은 1950년 10월 19일 연대 규모의 정찰대를 압록강 건너로 침투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10월 25일 13병단 본대가 강을 건넜다.

    사과와 반성은커녕 적극적 옹호

    이때 참모 중 상당수가 미군기의 공습을 우려해 밤에 소수로 나눠서 건너갈 것을 제안했으나 펑더화이는 “그럴 필요 없다”며 전 부대가 일시에 건너는 방안을 택했다. 13병단은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다리,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이 있는 지안(集安)과 북한의 만포를 잇는 다리, 그리고 두 다리 사이에 임시로 만든 나무다리(木橋)를 통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 중 현재 남아 있는 다리가 지안과 만포를 잇는 것인데, 지난 8월 김정일이 셋째아들 김정은을 대동하고 이 다리를 건너 중국 창춘(長春)으로 가서 후진타오(胡錦濤)를 올해 두 번째로 만났다.



    펑더화이의 결정은 옳았다. 대규모 부대가 일시에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자, 뒤이은 병단도 쉽게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듬해 1월 4일 중공군의 인해(人海)전술에 밀린 유엔군과 국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13병단 본대가 압록강을 건넌 10월 25일을 항미원조전 기념일로 정했다. 단둥에 있는 13병단 임시사령부 터에는 6·25전쟁을 끝낸 1953년을 기린다는 뜻으로 53m 높이의 탑을 세운 건물을 짓고, ‘항미원조기념관’이라 명명했다.

    한국도 다른 나라의 전쟁을 돕기 위해 파병한 역사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월남 파병이다. 1965년 한국은 베트남에 의용군이 아니라 군단 규모의 정식 군대를 보냈다.

    10월 3일은 전투부대 가운데 선두로 베트남에 파병된 해병대 청룡부대의 출전 4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 하루 전인 2일 부산항에서는 완전군장으로 상륙함을 타는 청룡부대를 재연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하객은 해병대 예비역 일색이었다. 해병대에서는 사령관이 아니라 교육훈련단장(준장)이, 부산시에서는 시장이 아니라 부시장이 참석해 축사를 읽었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월남파병 기념일을 정한 적도 없고, 기념행사를 연 적도 없다. 10월 2일 행사는 부산시의 발의로 ‘우연히’ 열린 것이다.

    1965년 해병대는 부산항 4부두에서 출전했는데, 이 부두는 현재 매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 3부두도 매립해 없앨 예정이어서 부산시가 3부두를 없애기 전, 부산의 역사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해병대 출전 기념행사를 연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사를 알리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으니, 파월(派越)의 의미를 되새기는 ‘정치적인 자리’가 될 수 없었다.

    한국은 1965년 일본과 기본조약을 맺고 국교를 재개했으나 일본에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에는 1990년 수교 이래 단 한 번도 6·25전쟁 참가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적이 없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베트남에서 발견된다. 베트남은 1992년 우리와 수교했지만 한 번도 한국군 파병을 문제 삼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것은 ‘오히려’ 우리였다는 사실이다.

    큰소리 치는 참전, 잊으려 하는 참전

    2004년 10월 10일 베트남의 호찌민 묘소에 헌화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무현 대통령. 그는 “우리 국민은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참가한 데 대해) 마음의 빚이 있다”며 묘소를 참배했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수교 후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이때 베트남의 국립묘지인 호찌민 묘를 방문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하노이에 도착한 김 대통령은 일부러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이러한 김 대통령에게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8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로 하노이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고 호찌민 묘소에 헌화하고 묵념했다.

    2004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베트남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도 베트남 측의 요구가 없었는데도 “우리 국민은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을 하고 호찌민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2009년 하노이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호찌민 동상에 헌화만 했다.

    이처럼 한국 대통령들의 태도는 둘로 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수로 분류되는 김영삼-이명박 대통령은 베트남전 참가를 사과하지 않으려 했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의 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알아서 사과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국가원수급은 한 명도 현충원을 방문한 사실이 없다.

    정부 차원서 의미 부여 있어야

    한·중 경제교류가 활발한 만큼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주석이나 총리들도 마음 한쪽으론 6·25전쟁 참가에 대해 미안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헌화 참배하거나, 6·25전쟁의 개입에 대해 사과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평양을 방문하면 달라진다. 평양에는 우리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대성산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이 있는데, 중국 지도자들은 이곳을 방문해 헌화한다.

    평양 인근에는 우리의 유엔군 묘지처럼 6·25전쟁에서 전사한 중국군을 위한 인민지원군 열사릉이 있다. 그곳에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사망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묘소가 있다. 지난해 10월 평양을 방문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마오안잉 묘소를 찾아 헌화 참배하고 “조국은 이제 강대국이 됐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중국 외교부는 항미원조전에 대해 정해놓은 정론(定論)이 있다며 시진핑을 옹호하는데, 우리는 5099명을 희생시켜놓고도 국가지도자가 사과하며 베트남전쟁을 잊으려고만 한다. 이러니 국민들은 열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 전사연구가는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역사의식 부재에 있다”며 “베트남전 참가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월남 파병을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연례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유아독존적 역사 인식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인식부터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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