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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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두 사내 … 액션하는 꽃미남들

김민석 감독의 ‘초능력자’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11-08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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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골목 두 사내 … 액션하는 꽃미남들
    비가 몹시 오는 날, 아이는 제 손으로 붕대를 풀고 아비를 살해한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했다기보다는 오래된 분노가 그를 집어삼킨 것이다. X맨의 악당이 세계대전의 상흔으로 초능력을 얻고 슈퍼맨의 쫄쫄이 바지가 외계산인 것과 달리, 우리의 초능력자는 시작부터 아비에 대한 원한으로 힘을 얻는다. 영화 ‘초능력자’. 슈퍼맨의 음화 같은 이 영화는 기존 할리우드의 초인 장르를 비틀고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해체해버린다.

    인형을 만드는 것이 취미인 초인은 어린 시절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뒤, 자기가 만든 세계에 갇혀 자폐적으로 살아간다. 눈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대신 식물화된 좀비 상태의 인간-인형들, 자신의 말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절대 권력을 누린다. 반면 초인의 초능력이 유일하게 통하지 않는 임규남은 중졸에 폐차장에서 일하는 너무나 평범한 청년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타자라 불릴 만한 외국인 노동자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이어간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와 다른 타자와 연대해서 살아가는 또 다른 타자의 대결은 처절한 추적극, 고난극과 맞물려 있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조감독 출신인 김민석 감독은 강렬한 액션과 긴장감 넘치는 두 사내의 대결 속에 그림자 가득한 서울의 뒷골목을 펼쳐놓는다. 특히 초인과 만나는 사람마다 좀비로 변모해 섬뜩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미지는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전체주의적 기운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한다. 예를 들면 초인의 어머니 집을 수색하러 들이닥쳤던 형사들은 초인의 초능력에 걸려 하수구를 열고 차례로 몸을 던진다. 마치 레밍(나그네쥐) 같은 쥐떼가 집단자살을 하는 듯 보이는 기계적인 움직임의 군상을 담은 이 장면은 품에 안았던 갓난아이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하철에 내던지는 무표정한 여자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반사회적 이미지가 판치는 이 공간에, 초인이 조종하는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이 공간에 구원은 있을까? 영화의 핵심에 바로 임규남의 희생과 부활의 서사가 숨겨져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폐차장에서 식사하는 최후의 만찬은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 ‘비리디아나’에 대한 오마주가 분명하고, 영화는 ‘터미네이터’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혼합한 질감과 질량으로 임규남의 부활을 반복한다. 임규남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영화는 종교적인 수난극에 가까울 수도 있는 터. 왜 임규남만이 초능력에 걸리지 않는가? 결국 이 사내는 수많은 나와 싸우는 너고, 수많은 너와 싸우는 나다. 특히 영화 ‘아저씨’에 이어 다시 등장하는 액션하는 꽃미남들, 고수와 강동원의 배우로서의 진화는 최근 한국 영화에 남성 관객과 여성 관객 모두를 빨아들이는 출발점이 되는 듯하다.

    신예 김민석 감독의 등장은 장훈 감독이나 이경미 감독처럼 ‘김지운, 김기덕, 박찬욱’ 같은 사부들, ‘좋은 감독 밑에서 수련받은 더 좋은 감독’의 가능성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이들이다. 특히 유창한 한국말과 돌발적인 발명품을 만들어주는 가나와 터키 출신 외국인 배우의 등용은 영화 ‘달콤한 인생’처럼 ‘초능력자’에도 묘한 이질적, 이국적인 유머감각을 남긴다. 김 감독은 할리우드 장르를 해체하고 비틀어 스타일리시한 시각적 이미지를 뽑아냄으로써 그의 혈통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입증하는 데 충분히 성공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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