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6

2010.10.04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휘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10-04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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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외롭고 힘없는 장렬왕후를 영원히 지키는 휘릉의 문·무인석과 석호와 석양.

    휘릉(徽陵)은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 조씨의 단릉이다. 경기도 구리시 창인동 산2-1의 동구릉지구 내 태조 건원릉의 서쪽 능선에 자리한다. 정비 인열왕후가 죽은 지 3년 뒤, 15세인 장렬왕후가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으로 지냈으나 자식 없이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조정은 극심한 붕당정치로 정권다툼이 첨예화돼, 특히 현종이 승하했을 때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조대비(장렬왕후)가 입어야 할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두 차례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인조 16년(1638) 인열왕후가 승하하고 3년 되는 3월 어느 날, 인조는 중궁전이 빈 지 오래돼 중전 간택을 지시했으나 대신들이 적극적이지 않고 사대부들도 간택에 호응하지 않자 노여워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당황하며 사대부가 협조하지 않아 간택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44세인 인조가 15세 이하의 어린 왕비를 간택한다 하니 스물아홉의 나이 차가 부담이 됐고, 게다가 1년 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어 신하의 예를 갖췄고, 세자인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 인평대군 내외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니 왕비의 자리라 한들 선뜻 딸을 내놓겠다는 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간택된 장렬왕후는 한양이 본으로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어머니는 완산부부인 최씨의 막내딸이다. 인조 2년(1624) 11월 정사(丁巳)일에 직산(稷山)현의 관아에서 태어났다.

    완산부부인이 태몽 때 달이 품 안으로 들어오고, 탄생 때 상서로운 무지개가 방에 가득했다 한다. 옥녀가 내려와 “갓 태어난 귀인이 장차 옥책을 열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 살 때부터 행동이 남다르고 말이 적었으며, 높은 곳에 앉기를 좋아하고 욕심이 담박(淡泊)하고 남에게 베풂이 많았다 한다. 워낙 어렵게 간택된 왕후인지라 아름답게 묘사된 듯하다.

    왕후라고는 하나 소현세자보다 열두 살 아래이며 봉림대군보다는 다섯 살, 막내 인평대군보다도 두 살 아래이니 인조는 아들들보다 어린 새 왕비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인조의 총애를 받는 귀인 조씨의 시샘과 안주인 행세에, 장렬왕후는 어쩔 수 없이 방에 칩거하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귀인 조씨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심양에서 돌아오자 그의 행세에 위기를 느끼고 소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이때 갓 결혼한 장렬왕후는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어머니의 예로 삼년복을 입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할 때 장렬왕후는 경덕궁에 나가 있다 국모로써 인조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그 자리를 귀인 조씨가 대신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귀인 조씨는 힘을 잃었고 조씨의 후원자였던 김자점도 쫓겨났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조씨가 아니었다. 자신의 무리를 청에 보내 인조의 장릉 지문에 송시열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고자질해서 청의 힐문을 받게 했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 숭선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꾸미기도 해 결국 사약을 받았다. 그악했던 귀인 조씨에 질려서인지 효종은 중전 시절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 장렬왕후를 어머니로 극진히 모셨다.

    인조의 아들들보다 어린 새 왕비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대비가 됐고,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됐다. 효종 국장 때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서인 송시열의 기년설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입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며 서인을 공격했다.

    이때 ‘국조오례의’에 기록이 확실치 않아 중국의 ‘주례’와 ‘주자가례’ 등 예론에 의거, 다섯 가지 복상을 예로 설전을 벌였다. 첫째 3년 복인 참최(斬衰), 둘째 3년 또는 1년 복인 재최(齊衰), 셋째 9개월 복인 대공(大功), 넷째 5개월 복인 소공(小功), 다섯째 3개월 복인 시마(?麻) 등이 있다. 참최는 부모상에는 자녀가 3년복을 입고, 반대로 큰아들인 장자상이 먼저나면 그 부모가 3년복을 입는 제도다. 따라서 당시 예학의 최고인 이조판서 송시열은 효종이 둘째이기 때문에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조참의 윤휴는 효종이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고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으니 장자의 예에 따라 재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4종설(正而不體, 體而不正, 正體不得傳重, 傳重非正體)을 들어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부터는 모두가 서자이고 효종 또한 그렇다고 해 기년복을 주장했다. 결국 1차 예송논쟁은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설이 받아들여져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남인은 서인의 주장이 효종을 체이부정(體而不正·서자가 대를 이은 것)으로 몰아가는 것이라며 공격했다. 즉 효종이 서자라는 뜻이라며 윤선도 등이 주장해 혼란에 빠졌다. 논쟁이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하자 현종은 논쟁을 금지시키고 기년복으로 결정했다.

    이후 서인이 정권을 주도했다. 하지만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자 다시 시어머니인 대왕대비(장렬왕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됐다. 남인은 기년설(1년 복상)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했다. 서인은 중국 고례(古禮·사가의 풍습)에 맏며느리 상에는 기년설(1년복)을 입고, 둘째부터는 대공복(9개월복)을 입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남인은 국상에서는 큰아들과 맏며느리의 복제가 모두 1년이며, 효종 때도 그랬고 ‘국조오례의’에도 예시돼 있음을 들어 효종 국상 때 참최(3년복)를 재최(1년복)로 하고, 이제 와서 재최복을 대공복으로 하는 것을 지적하며 서인의 주장을 공격했다. 당시 송시열이 낙향해 있었다.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1 아직도 복상 문제로 다투는 듯한 휘릉의 문·무석인. 2 인조의 사랑도, 후사도 없이 평생을 상복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장렬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에 영면했다.

    이에 대해 남인은 현종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서자의 손으로 하려는 의도라며 서인을 공격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현종은 “기해년(효종국상)에 복제를 국가 예제(國禮)에 의한 것으로 알았는데 고례(古禮)에 의거했다 하니, 이것은 국가에 쓰는 복은 가볍게 여기고 선왕(효종)을 ‘체이부정’으로 여긴 것이다. 임금에게는 박하고 누구에게 후덕하자는 것이냐. 이번 인선왕후 상에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은 기년으로 마련하고, 국가제도에 장자복 기년을 3년의 참최복으로 고쳐라”고 명했다. 결국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돼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됐다.

    국가적 혼란 속에 자식들보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장렬왕후는 ‘국조오례의’ 등 선례가 없는 자손의 국상을 당해 2차례나 예송논쟁에 휘말렸다. 사실 예송논쟁은 단순히 ‘의례’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왕위의 정통성 시비와 연관된 정권다툼이었으며, 정치적 입장 표명이었다. 서인은 신권(臣權)을 강화하기 위해 “천하의 예는 모두 같다(天下同禮)”는 것으로 왕실도 사대부 집안의 예와 다르지 않다는 주장했고, 남인은 “왕실의 예는 일반 사대부와 다르다(王者不同士庶)”는 논리를 세워 강력한 왕권 중심의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다.

    숙종 14년(1688) 8월 대왕대비(장렬왕후)의 환후가 날이 갈수록 위독해 숙종은 서증조모인 장렬왕후의 쾌유를 빌기 위해 대신을 종묘와 사직에 보내고, 종신을 산천에 보내 정성껏 기도하고 죄수들을 석방하고 양전(兩銓·이조와 병조)에 면세와 탕척(蕩滌·죄를 면해줌)을 했으나 그해 8월 26일 묘시(卯時·새벽 5시부터 7시)에 대왕대비가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승하했다. 서증손인 숙종이 상주가 돼 국장을 치렀다.

    그동안 장렬왕후는 남편인 인조, 서세자 소현세자, 서자 효종 내외, 서손 현종 내외를 앞세우면서 자신이 어떻게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서인, 남인의 정쟁으로 많은 시련을 겪은 장본인이다. 왕실에 들어와 역대 가장 많은 여섯 번의 상복을 입는다. 상복 문제로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상주가 된 숙종은 서증조모인 장렬왕후의 장례 때 어떤 상례복을 입어야 하는지 예민해졌다. 숙종은 마땅히 국상 상례복을 입으려 하나, 친손까지는 ‘오례의’에 따라 친자의 의례 제복을 입고 증손부터는 기록도 없고 선례도 없어 고민하다, 결국 고례(사가)의 예를 따라 종친의 기년예(1년)로 간략하게 입는다.

    4대 걸친 왕실 어른 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1 휘릉의 석호는 파주 장릉에서부터 나타난 세련되고 해학적인 조각을 보여준다. 2 숙종 대에 조영된 휘릉은 직전에 만든 숭릉, 직후에 만든 익릉과 더불어 정자각 정전이 좌우 한 칸씩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여섯 번 상복 입으며 붕당정치 지켜봐

    시호는 천리가 바르면서 뜻이 화평하고 덕을 갖고 선업을 준수했다고 해 장렬(壯烈)이라 하고, 능호는 휘릉(徽陵)이라 했다. 휘릉의 조영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가 없고 ‘숙종실록’에도 간략한 기록만 있어 선지(選地)와 조영의 상세 과정은 알 수 없다. 휘릉은 손자인 현종과 손자며느리 명성왕후(明聖王后)가 묻힌 숭릉(崇陵)보다 5년 뒤에 조영해 전반적으로 석물의 형태가 숭릉과 비슷하며,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쳐 있다. 문·무석인은 얼굴이 크고 목이 없어 턱이 가슴에 붙은 형상이다. 혼유석 아래의 고석이 건원릉 형식을 따른 5개인 것을 보아 옆의 건원릉의 예를 일부 따른 것으로 사료된다.

    난간석 바깥쪽에 석호 2쌍과 석양 2쌍이 밖을 향해서 봉분을 호위하며 사실적, 해학적으로 묘사돼 있다. 석호(石虎)는 능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며, 석양(石羊)은 사악한 것을 피하고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호랑이는 지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용맹한 것으로 지상의 모든 미물을 수호해주기를 위해서이고, 석양은 지하의 미물을 지켜주는 영물로 지하세계 미물의 수호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석호는 중국과 베트남의 능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만이 갖는 수호 조각물이다.

    휘릉은 정자각이 직전에 조영한 숭릉(현종과 명성왕후, 1683)과 익릉(숙종의 정비, 1680)처럼 정전의 양옆에 한 칸씩 익랑이 덧붙은 게 특이하다. 당대의 조영 특성으로 보인다.

    남편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후사도 두지 못한 장렬왕후는 상복 문제로 끌려다니다 당쟁의 명분만 제공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어서도 인조 옆으로 가지 못하고 동구릉에 묻혔다. 다행히 280년 전 유택을 조영한 태조의 건원릉과 이웃하고 있으니, 태조 이성계의 사랑을 영원히 받는 것 같다. 태조도 외롭게 홀로 쉬고 있으니 더욱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인조의 왕릉은 이곳에서 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정비 인열왕후와 합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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