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6

2010.10.04

해방 전까지 고향 안 떠났는데 1943년 함경북도에 가 면허 취득?

구당 경력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의문들…선친에게서 침구술 배운 것도 아리송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0-10-04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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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 김남수 옹이 유명세를 타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80년의 혼이 서린’ 의술 활동 경력이다. 구당을 설명할 때 ‘열한 살에 선친으로부터 침구술을 배워 80년 동안 의술 활동을 해온’ 경력은 빠뜨릴 수 없다. 비록 뜸을 뜨는 구사자격증은 없지만 침사자격증을 취득했기에, ‘최소한 침술은 제대로 배웠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조차도 사실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침뜸 배웠나

    구당은 1915년 5월 12일 전라남도 광산군 안청리에서 김해김씨 문경공파 7세손인 부친 김서중과 모친 최임곡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 뜸사랑 침뜸의학 전상희 교수 지음).

    아흔다섯. 구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놓는 침뜸 효과와 아흔이 넘는 나이를 강조해왔다. 2008년 KBS 추석특집으로 방영된 ‘구당 김남수의 침뜸 이야기’에서 사회자가 “94세가 맞느냐”고 묻자 “나이는 많지만 몸이 건강해서 충분히 일할 수 있다. 6시에 기상해 오후 5시까지 11시간을 서 있다. 이는 침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해김씨 문경공파 대동보에 나타난 그의 출생일은 1922년 5월 12일로, 그가 말하는 나이와 차이가 크다.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15년생이 맞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나이를 속이겠는가. 족보는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당의 설명대로 1915년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열한 살 때 선친에게서 침술을 배웠다”는 그의 말은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그동안 구당은 “처음에는 침을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어느 정도 눈이 트인 뒤엔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침술교육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고 밝혀왔다(‘침사랑 뜸사랑 아~내사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열한 살 때부터 의원인 부친에게서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다”고 거듭 주장했다(서울신문 2008년 9월 29일자 등). 하지만 제적등본에 나타난 구당의 선친인 김서중 씨의 사망 시기는 1915년 2월 28일. 두 기록을 비교하면 구당이 태어나기 3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구당에게 침뜸을 가르친 셈이 된다.

    이에 구당은 “호적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본인이 선친에게서 배운 것이 분명한데 부친의 사망신고일까지 파헤쳐서 말한다면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향에 가서 알아보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구당의 고향으로 가서 친척들에게 확인한 바는 구당의 주장과 차이가 컸다. 8월 27일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평산리에서 만난 친척 김모 씨는 “(구당은 부친의) 얼굴도 모른다. 기수(구당의 형, 작고) 씨가 다섯 살 때 (구당의 부친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1910년생인 김기수 씨가 다섯 살이 된 해는 1915년이다.

    한때 구당이 부회장직을 맡았던 관인침구학원 동창회 및 재야 침구학계 일각에선 구당이 선친에게서 침구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광복 전후로 서울에 올라와서 침구술을 배웠다고 주장한다. “구당에게 침술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재야 침구학자 A씨는 “한자로 자기 이름 정도 겨우 쓰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배웠다. 방송이 구당을 우상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사람이 1987년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는 책을 가져와서는 봐달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관인침구학원 출신인 B씨는 “광복 전후로 구당을 만났다. (당시만 해도) 구당은 (관인침구학원에서) 휴지 치우는 일을 했다. 우리 몇 사람이 ‘김 선생(김남수) 차 좀 끓여와’ 그렇게 말했을 정도”라며 구당이 침구학원에서 침술과는 무관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침술 경력 80년 아닌 30년?

    해방 전까지 고향 안 떠났는데 1943년 함경북도에 가 면허 취득?

    구당은 재판을 통해 1983년 7월 25일 침사자격증 취득을 인정받았다.

    이에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모두 말하는데 침구학원에 다닌 것을 문제 삼다니 어이가 없다”며 “당시 그 학원에서 침구 강의를 양의사인 해부학 교수가 한다고 해, 해부학이 알고 싶어서 학원을 다녔다. 뜸사랑 정통침뜸교육원도 해부학을 가르치는데 의사나 간호사에게 강의를 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에 배움의 지평을 넓히는 걸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또한 재야 침구학계의 주장에 대해 “언제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 증거를 대라”고 주장했다.

    구당의 말대로 “선친으로부터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고, 배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침구학원을 다녔다”고 해도, 구당의 80년 의술경력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43년 자격증을 취득하여 침술원을 운영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면허를 따려고 해서 딴 게 아니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사람들이 면허를 받아야 한다면서 군수인지 도지사한테 추천해주었는데, 거기 가니까 면허를 주더라고. 그때는 군수나 도지사 같은 사람이 일부러 면허를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 245쪽). 구체적으로는 “전라북도 군수서장이 침구사 추천을 해 도지사에게 올려 지난 1943년 침사자격증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브레이크뉴스 2008년 12월 19일). 80년에 이르는 구당의 의술경력은 바로 이 자격증 취득과 침술원 개설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과연 구당의 말처럼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조선인이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군수서장의 추전만으로 면허 취득이 가능했을까. 구당의 주장은 당시 침구사 면허를 취득한 이들의 증언과 상반된다. ‘일본 등 외국에서 침구학교를 졸업한 졸업증명서를 소유한 자’ ‘침구학원을 졸업한 자’ 등 특별전형에 속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시험을 치른 뒤 합격자에 한해 면허(당시에는 현재의 자격증이란 명칭이 없었고 면허증으로 불렀다)를 주는 것이 당시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4년 10월 제정된 조선총독부경령 제10호 안마술·침술·구술영업 취체(取締)규제 어디에도 ‘추천만으로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 때 침사면허를 취득한 김학진(85) 씨는 “1년에 한 번씩 도(道) 경찰국 위생과에서 (침구사)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과목은 침구과, 내과, 경혈학과, 병리학과 등이었다”며 “나의 경우에도 충청남도, 경기도에서 두 번씩이나 떨어지고 난 뒤에야 1943년 함경남도에서 치른 시험에 합격해 면허증을 얻었다”고 말했다.

    구당의 말대로 그가 뛰어난 침구 실력을 인정받아 예외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침사자격증을 취득했음을 인정한다 해도 석연치 않은 부분은 또 있다. 그가 공식적으로 침사자격증을 취득한 시기가 1983년 7월 25일(서울 제115호)이기 때문이다. 관할 기관에 존재하는 기록상으로도 그렇고, 그가 개원한 남수침술원에 걸려 있는 자격증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그는 이 자격증에 대해 “재판을 통해 재교부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취득한 자격증을 바탕으로 구당은 1983년 8월 2일 남수침술원을 공식적으로 개설 신고했다(신고번호 제92호). 남수침술원의 개설 신고기관인 서울시 중구보건소 관계자는 “침술원 개원 기록은 1960년 이후 것부터 존재하는데 1983년 이전에는 남수침술원 개원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즉 본격적인 침뜸 의술활동 기간은 침술원 개설 기준으로 보면 80년이 아니라 30년인 셈. 물론 공식적으로 침술원을 운영하지 않고도 침술 활동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 행적은 침술 활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구당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뜸사랑 측 관계자가 작성한 ‘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해방 이후 형제가 한집에서 살았는데 형 기수가 정미소 사업에 실패하고 재산을 탕진하자 처가로 가서 의탁, 4개 면에 담배 농사를 짓게 하면서 농가 소득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고향을 전혀 떠나지 않고 있다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 때가 1953년으로 무려 나이가 38세에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노무 사단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한다. (중략)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선생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우연히 고향 광산군 비아면에서 파출소장을 하던 지인을 만나 그의 소개로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판문점에서 창고를 짓는 일에 목수라고 속이고 참여하기도 한다.’

    해방 전까지 고향 안 떠났는데 1943년 함경북도에 가 면허 취득?

    1 구당의 함경북도에서 침술활동을 증언한 김양술 씨 가족들은 김양술 씨가 광복 전후 전라도에서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2 전라도 장성군에서 만난 구당의 친척은 “구당의 아버지는 구당의 형 김기수 씨가 다섯 살 때인 1915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3 관인침구학원 출신 B씨는 “구당이 침구학원에서 침술과는 무관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동직자 2명 보증자 세우고 경력 인정받아

    이에 대해 구당은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자격증 갱신 시기에 더 이상 침술원을 운영하기 싫어 갱신 신청을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다시 침술원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갱신 시간이 지나서 자격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소송을 해야 한다고 하여 소송을 통해 침사자격을 취득하였다”고 밝혔다.

    구당이 언급한 소송은 1982년 고등법원에서 받은 ‘침사자격 존재확인(사건81구 549)’ 건이다. 구당은 이 재판에서 자격증 취득 사유를 인정받아 대법원 판결을 거쳐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재판부는 구당에게 침사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이유로 “해방 전인 1943년 4월 함경북도에서 실시한 침사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5월 함경북도 도지사로부터 침사자격 면허를 취득한 다음 함경북도 학성군 학성면에서 금천침술원을 공동으로 개설 운영하여 오다가 해방 후 월남하면서 침사면허증을 가지고 오지 아니한 사실”을 들었다. 이때 구당은 이북5도청 사무규정에 의거해 동직자 2명을 보증자로 세우고 이들을 통해 함경북도에서 침술 활동을 했다는 경력을 인정받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재판부가 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구당이 그동안 공식적으로 언급했던 내용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대목이다. 구당은 지금까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43년 서울에서 남수침술원을 개설했다”며 “전라도 도지사로부터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밝혔다. 뜸사랑 측 관계자가 작성한 ‘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에선 ‘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진 남북전쟁은 40여 세를 바라보는 선생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여 그때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선생을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해방 전 고향을 떠난 적도 없다’는 사람이 어떻게 함경북도까지 가서 자격증을 취득했던 것일까?

    당시 구당의 함경북도 침술활동을 증언한 이는 지금은 고인이 된 황진서 씨와 김양술 씨다. 하지만 황씨는 본적이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으로 일본에 거주하다 광복 후 남한으로 왔다. 김씨 역시 원적은 전라남도이며 광복 전후 주 활동지역은 전라도였다. 구당이 1943년부터 광복 후까지 함경북도에서 의료 활동을 했는지 파악해주기에는 어려운 위치의 인물들인 셈이다.

    이에 대해 구당과 뜸사랑 측은 “(자격증 갱신) 과정에서 소송을 변호사에게 일임해 모든 일이 처리됐고, 변호사가 어떻게 활동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문제도 당시 변호사가 아닌 본인이 이야기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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