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8

2010.08.02

폭파범 김현희 국빈급 訪日 퍼포먼스

비용만 3000만 엔 황장엽 때의 3배 납치 피해자 관련 정보는 거의 없어

  • 도쿄=이종각 한일관계전문칼럼니스트 jonggak@hotmail.com

    입력2010-08-02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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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48) 씨는 일본 방문 기간(7월 20~23일) 중 가진 일본 TV와의 인터뷰에서 간간이 웃었다. 1987년 11월 말, 25세 처녀 공작원으로 115명의 희생자를 낸 대참사를 저지른 그가 사건 이후 공개석상에서 웃는 모습을 필자는 처음 봤다. 그에게는 폭파 사건 후 첫 외국여행이자, 첫 일본 방문인 이 여행이 흐뭇한 미소를 지을 만한 나들이였다.

    “국빈급 대우”(요미우리신문, 7월 24일자 사회면 톱), “이례적인 환대…헬기로 도심 유람”(아사히신문, 7월 23일자 사회면 톱), “김 전 공작원 초청비 3000만 엔 넘어…‘국빈 대우’”(산케이신문 7월 24일자 3면 톱).

    일본 언론뿐 아니라 영국 ‘인디펜던트’도 도쿄발 기사에서 “제트기를 폭파한 전 북한 스파이가 일본에서 환대받다” “믿기 어려운 스파이 스토리” 등의 표현으로 놀라움을 전했다.

    김씨는 일본 정부가 준비한 소형 전세 비행기로 7월 20일 새벽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린 뒤, 별장지로 유명한 가루이자와(輕井澤)에 있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의 별장으로 직행했다. 일본 정부는 김씨가 탄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통과할 때마다 신호를 청색으로 바꿔 지체 없이 통과하도록 배려했다. 이 차량의 앞뒤로 경찰차가 에워싸 경호를 했고, 경시청과 나가노(長野) 현 경찰 등 100여 명이 경비에 동원됐다. 일본 경찰 간부는 “클린턴 미 국무장관급, 준국빈에 해당하는 경비 태세”라고 말했다.

    한 시간 동안 헬기로 도쿄 주변 유람



    하토야먀 전 총리가 별장을 숙소로 제공한 이유는, 김씨가 평양에서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장남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33) 씨에게 “조용한 곳에서 요리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한 의사를 존중하고, 경호의 안전 등을 고려해서라고 한다.

    김씨는 이 별장에 이틀간 머물면서 다구치 씨의 장남에게 요리를 해주었고, 납치 희생자인 요코다 메구미(橫田めぐみ) 씨의 부모와도 만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일본 방문 사흘째인 7월 22일, 도쿄의 특급호텔인 데이코쿠(帝國) 호텔로 옮기면서 헬기로 한 시간가량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유람 비행했다. 후지산을 한번 보고 싶다는 김씨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민간 항공사의 헬기를 임대한 것이다. 이 헬기의 한 시간 임대료는 70만~80만 엔이라고 한다.

    나카이 납치문제담당상은 단지 ‘경호를 위해’ 헬기를 이용했다고 강조하면서 “도쿄 상공을 한번 보여주는 정도의 일을 비난한다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정보를 가지고 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씨에게 ‘사례’를 지불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했다. 김씨의 방일 경비는 납치 사건 관련 일본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는데, 올해 예산은 2009년의 약 2배인 12억 엔이 책정돼 있다.

    김씨는 대한항공기를 폭파시킨 범인으로 한국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1990년 3월)된 직후 특별사면됐지만 일본 관계법상 입국 거부 대상자다. 사건 당시 일본인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의 위조여권을 소지해 위조공문서행사 혐의도 있다. 일본 법무성 장관은 출입국관리법의 ‘상륙을 거부하지 않는 특례’를 적용해 김씨의 입국을 허가했다.

    일본 정부는 올 4월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서기를 초청했다. 황씨는 ‘북한의 최대 암살 대상’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일반 여객기를 이용했다. 김씨의 방일 때도 일반 여객기를 이용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김씨가 대한항공기를 폭파한 과거가 있는 만큼 통상의 여객기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전세 비행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정 등으로 김씨의 방일 경비는 황씨 때(알려진 액수는 약 1000만 엔)의 ‘3배에 달할 것’이라고 일본 신문은 전하고 있다.

    김씨는 방일 마지막 날 호텔에서 다른 일본 납치 피해자 여섯 가족과 만났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들에게 전해준 결정적인 정보는 없었다. 김씨가 평양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나서 일본인 납치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알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동안 일본 정부 관계자가 한국으로 가 김씨로부터 관련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납치 피해자 가족들은 “용기 얻었다”

    김씨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절대로 살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피해자 가족은 대부분 김씨의 격려에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스컴과 야당 등은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이렇다 할 정보 제공도 없는 김씨를 일본으로 불러 국빈 대접을 하며 막대한 예산을 쓰는 것은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제1 야당인 자민당의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총재가 “전 총리 별장에 숙박시키는 것 등은 그야말로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정부 측은 “퍼포먼스라면 참의원 선거(7월 11일) 전에 (방일)했을 것”이라고 반론했다.

    일본의 TV 방송들은 헬기까지 동원해 김씨의 이동경로를 생중계하는 등 뜨거운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납치 피해자 가족 면회와 ‘여론 환기’를 위한 초청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김씨의 공식 기자회견은 열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한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것”(나카이 납치문제담당상)이라고 한국 측에 떠넘겼다.

    일본 정부는 왜 김씨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환대했을까? 일본인 납치 문제는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정권 때인 2008년 8월 일본과 북한 간 실무자 협의 이후 교섭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정권 교체에 성공한 민주당으로선 국민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2002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평양을 방문한 직후 일본인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으로 돌아온 뒤, 북한은 납치 문제는 사실상 끝났다는 태도여서 일본 정부가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에 따라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여론도 무기력한 정부를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민주당 정부는 새로운 정보가 없더라도 김씨를 초청하는 것이 납치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이번 김씨의 방일에 대해 일반 시민 중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도 상당수 있다.

    한편 북한 핵 문제와 천안함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한·미·일 공조를 강화해야 하는 한국 정부가 김씨의 방일을 적극 협조한 측면도 있다. 대북 화해, 협조 노선을 추구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김씨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노무현 정권 때에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조작극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명박 정부는 김씨를 일본으로 보내 북한 공작원이란 사실을 확인시킬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한일 정부의 사정과 계산이 맞아떨어져 김씨의 방일이 성사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김씨에게 경호상의 이유로 국빈 대접을 한 것이 ‘전 테러리스트에 대한 과공(過恭)’이란 역풍을 맞고 있다.

    김씨가 1990년대에 쓴 자서전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등의 일본어 번역판은 수십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폭파사건 당시 20대였던 공작원은 중년 부인이 돼 일본에 나타나 더욱 유명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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