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6

2010.07.19

反正에 ‘죄인의 딸’로 둔갑 7일간 왕비, 49년간 폐비 비운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온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7-19 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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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正에 ‘죄인의 딸’로 둔갑 7일간 왕비, 49년간 폐비 비운

    단아한 모습의 온릉 전경.

    온릉(溫陵)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신씨(愼氏)의 능이다. 단경왕후의 능침만 있는 단릉(單陵)으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에 있다. 39번 국도와 인접하며 교외선 온릉역과 장흥역 사이에 있다.

    단경왕후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가 고모와 아버지, 삼촌 등이 연산군 폐위 때 축출되고 사사돼 왕비 생활 7일 만에 폐비됐다.

    단경왕후는 1487년(성종 18) 1월 15일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3세인 1499년(연산 5)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으로 봉해졌다. 단경왕후는 10대 임금 연산군 비 신씨의 외질녀다. 즉 연산군의 비는 단경왕후의 고모이며, 연산군과 남편 중종은 배다른 형제이니 사가에서는 고모와 조카이고 왕실에서는 동서지간이다.

    1506년 9월 2일 지중추부사 박원종과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주동이 돼 선왕인 연산군을 폐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바로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중종반정이다. 반정 주모자 박원종은 연산의 신임이 두터워 도부승지, 좌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그는 왕 서열 1위였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부인(연산에게 큰어머니)인 자신의 누이를 연산군이 궁으로 불러들여 많은 배려를 하는 과정에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연산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이후 박원종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거사 당일 연산군은 경기도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하고 있었다. 폭정과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던 연산은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이날 정적들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연산은 장단 나들이를 취소했으나 이미 유순정과 신윤무, 장정, 박영문 등이 거사에 동조하면서 반정은 쉽게 이루어졌다. 한편 단경왕후가 되는 신씨는 이날 아버지 신수근과 작은아버지 신수겸이 제거되고, 친정 형제들은 멀리 귀양 보내진 것을 몰랐다.



    박원종은 거사 직전 연산의 매부이며 진성대군(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을 찾아갔다. 신수근은 당시 연산의 총애를 받는 실권자였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한지를 물었다. 이 물음의 의미를 알아챈 신수근은 버럭 화를 내며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것 없다”고 못 박았다. 이 한마디로 신수근은 거사 당일 제거되고, 단경왕후는 죄인의 딸로서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박원종 일파의 주장으로 7일간의 왕비 생활을 거두고 사가로 쫓겨났다. 신하들이 단경왕후의 중전 불가론을 주장할 때 중종은 조강지처 이론을 내세워 반대하나 종사의 대계 논리에 밀려 결국 궁궐에서 내쳐졌다. 이날이 9월 9일이다. 다음 날 예조에서는 서둘러 새 중전의 간택에 들어갔다. 그가 바로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윤씨가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승하하자,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의 상소로 단경왕후 복위 논의가 있었으나 중종반정 세력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폐비된 단경왕후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다.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궁궐의 누각에 올라 그녀의 본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씨 집에서는 뒷동산에 있는 바위에 신씨가 궁중에서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중종은 이 분홍색 치마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병환이 위급해지자 신씨(단경왕후)를 궁궐로 불러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승하했다.

    反正에 ‘죄인의 딸’로 둔갑 7일간 왕비, 49년간 폐비 비운

    1 온릉의 제향공간으로 좌청룡수가 흐르도록 한 은구(배수구)가 있다. 이는 자연친화적인 온릉만의 특색이다.2 온릉의 석호는 귀엽고 아담한 온화한 호랑이다.

    친정아버지 신수근 연산군 편들다 제거당해

    궁궐을 떠나 49년간 사가에서 외롭게 한평생을 보낸 폐비 신씨는 1557년(명종 12) 12월 7일 소생 없이 71세로 승하했으며, 친정 묘역 언덕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모셔졌다. 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수근의 후손이 봉사하다 1698년(숙종 24) 왕비추복상소(王妃追復上疏)가 있었으나, 묘당의 이론이 맞지 않는다 하여 예조에 명해 연경궁지에 사당을 세우게 했다. 이후 1739년(영조 15) 3월 28일 영조가 익호를 단경(端敬),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추봉하고 새롭게 상설을 설치했다. 능침의 상설은 추봉된 왕비릉인 태조 계비 신덕왕후 정릉(貞陵), 단종의 장릉(莊陵)과 단종 비 사릉(思陵)을 따랐다.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하고 나머지 상설제도는 그대로 따른 형식이다. 1807년 순조 7년 4월에 표석을 설치했다.

    온릉의 정자각은 익공식(翼工式)의 맞배지붕으로, 산릉제례(山陵祭禮)를 올리는 장소다. 정자 모양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2칸의 구조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 비각은 정자각 동쪽에 위치, 비문을 통해 이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내부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朝鮮國 端敬王后 溫陵)’이라 음각돼 있으며, 1807년 순조 7년 4월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것이다.

    상계의 봉분 주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으며 곡장 내에 석양과 석호 1쌍이 봉분을 수호하고 있다. 무석인도 생략해 없고 문석인만 한 쌍 있다. 이는 추봉(追封) 비릉(妃陵)의 예에 따라 능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능원은 능침 하계의 좌측 하단에 산신석을 놓아 3년간 제사의 예를 갖추고, 사가 묘역에서는 좌측 묘지 상단에 산신석을 배치한다. 왕릉에서는 산신도 왕의 통치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능침 아래에 산신석을 배치했다. 이곳 온릉의 능침 좌측 계곡 상단에 있는 산신석은 일반 묘의 형식으로 됐다가 추봉된 능역임을 알 수 있는 시설이다.

    문석인은 봉분의 한 단 아래 중계에 자리하며 장명등을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공복을 입고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했던 복두(頭)를 쓴 모습으로, 홀을 쥐고 문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체가 크고 하체가 짧은 4등신의 형태인데 이는 숙종, 영조대의 조각 형태다. 장명등은 낮은 하대에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화사석은 4각으로 소박한 인상을 준다.

    反正에 ‘죄인의 딸’로 둔갑 7일간 왕비, 49년간 폐비 비운

    영조대에 조영된 온릉의 장명등.

    조선시대 능묘 앞의 수호상인 석양은 왕릉 주위의 사악한 지하세계 귀신과 기운을 물리치고, 석호는 지상세계의 능을 호위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닌다. 석양과 석호의 배치는 봉분과 곡장 사이의 공간에 머리를 바깥으로 향하게 교대로 배치하고 있다. 온릉의 제향공간 중간에는 좌청룡수의 배수를 위해 은구(隱溝·숨어 있는 물길)가 설치돼 있다. 좌청룡수는 대체적으로 홍살문 앞으로 흘러 금천교를 지나는데 이곳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다. 이런 형식은 효종의 영릉에서 볼 수 있는데,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제향공간에 금천교를 설치한 예로 자연지형에 맞게 조영한 독특한 예다. 아마도 사가에서 능침 조영 후 왕비 능으로 추봉, 설치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릉은 사가에서 자리 잡은 곳으로는 드물게 절색의 경관을 자랑한다. 앞의 조산인 북한산 능선이 웅장하며, 좌측에는 도봉산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온릉의 재실은 의정부(議政府)와 벽제(碧蹄) 사이 39번 국도변에 자리하던 것을 1970년 도로 확장 때 철거, 현재의 홍살문 서남측에 세운 것이다. 원위치에 원형 복원이 아쉽다.

    온릉은 능역 앞을 휘돌아 흐르는 일영유원지와 장흥유원지 등 주변에 물놀이 시설이 많아 여름에 찾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비공개 능이라 사전에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지구상 어느 민족도 하지 못한 능원의 생태카펫 잔디

    反正에 ‘죄인의 딸’로 둔갑 7일간 왕비, 49년간 폐비 비운

    부드러운 유선형인 조선 왕릉의 잔디밭은 유럽인에게 골프장을 연상케 해 감탄사를 자아낸다(창릉).

    우리나라 능원에는 절대적으로 잔디를 피복한다. 들잔디로 학명은 Zoysia Japonica L.이다. 잔디는 들잔디, 금잔디, 비로드 잔디, 버뮤다 그라스, 벤트 그라스 등 종류가 많다. 우리가 골프장에서 흔히 보는 잔디는 서양의 한지형 잔디로 벤트 그라스(Bent grass)다. 골프공을 구르게 하는 데 제일이다. 추운 곳에서도 푸른 한지형 잔디라 겨울에도 아름답다. 우리나라에 주로 자라는 들잔디는 난지형으로 겨울에는 갈색으로 변한다. 겨울에 따뜻한 느낌을 주며, 실제 토양을 피복해 지온을 높여준다.

    조선 왕실에서는 궁과 능에 들어가는 나무와 꽃을 특별히 관리, 공급했다. 이것을 재배하고 관리하던 곳이 모화관(慕華館·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왕실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왕릉의 대표적 식물인 잔디와 소나무는 반드시 모화관의 것을 사용하도록 했다. 특히 능침공간의 잔디는 절대적으로 그랬다. 실록에는 “입이 가늘고 그 뿌리가 잘 발달한 것으로 봉분 조영 시 석회, 모래, 황토로 만든 삼물(三物)의 단단한 구조물을 잘 감싸는 잔디로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즉, 조선의 왕릉에는 반드시 입이 가늘고 짧으며 분얼경(分蘖莖·줄기)의 번식이 잘되는 한국형 들잔디를 인위적으로 모화관에서 재배해 공급했으며, 능상의 잔디 씨 보식은 온도가 높은 8~9월에 했다. 잔디 씨는 높은 온도에서 싹이 잘 튼다. 잔디의 관리는 철저해서 겨울에 잔디에 불이 나면 능 관리인들을 엄벌에 처하고, 왕실에서는 나라의 변고라 하여 위안제를 지냈다. 이런 풍습이 민가에 전해져 묘지에 불이 나면 깨끗이 청소하고 볏짚을 잘게 썰어 덮어주는 분장제도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1625년(인조 3) 2월 23일 창릉(昌陵)에 불이 나자 인조는 조회를 폐하고, 백관과 함께 3일간 소복을 입고 위안제를 올렸다.

    광릉의 기록에 따르면 세조의 능침은 삼물이 너무 강해 잔디 뿌리가 엉기지 못했다. 따라서 정희왕후의 능침에는 삼물을 약하게 하도록 한 점을 미루어, 잔디와 삼물의 혼합으로 봉분에 뿌리가 발달해 잘 엉키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왕릉 연구자로 중국, 베트남, 유럽 등 많은 왕릉을 답사하고 연구했다. 그러나 우리 왕릉처럼 부드러운 유선형의 지형 곡선을 이루고, 그 위를 잔디로 피복해 골프장의 아름다움을 연상케 하는 조영 방법을 보지 못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한국을 찾은 많은 학자도 아름다운 잔디 곡선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자의 공간이라기보다 아름다운 잔디정원이며 골프장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잔디 위에서 하는 게임에 강한가 보다. 골프와 축구가 그렇지 않은가. 조상의 음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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