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3

2010.06.28

“열려라! 마음의 비밀”

마음과 인공물(人工物) 연결하는 사람 중심 인지과학, 학계서 논의 활발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입력2010-06-28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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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 음악, 건축, 해부, 기계 등 다방면에 정통했다. 미켈란젤로도 붓과 펜과 망치 사이를 오가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고대부터 18세기까지 학자들은 자유롭게 학문을 넘나들며 지적 탐구활동을 벌였다. 지금은 아니다. 근대 이후 분과학문 체계가 정립되면서 영역 구분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미래에는 다시 하나의 학문으로 회귀할지 모른다. 최근 ‘인지과학’을 중심으로 학제 간 교류가 활발해지는 추세다.

    인간의 마음은 블랙박스

    5월 26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과 중앙대 인문과학연구소는 ‘인지과학과 학문 간 융합의 원리와 실제’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틀 뒤인 28일에는 한국인지과학회가 학술대회와 포럼을 개최했다. 관련 학과도 늘었다. 이화여대는 올해 뇌인지과학 협동과정을 개설했고, 지난해에는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시행하는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World Class University)의 일환으로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에 관련 학과가 신설됐다(모두 석·박사 과정). 그렇다면 인지과학은 어떤 학문일까.

    인지과학이라는 용어는 대중은 물론 학계에서도 아직 낯설다. 학문이 싹튼 미국 주요 대학이 내린 정의를 보자. ‘마음·뇌·행동을 탐구하는 학문’(하버드대학), ‘마음·뇌의 과학’(코넬대학), ‘중심 문제는 마음의 이해이고, 중심 아이디어는 컴퓨터의 프로그램처럼 뇌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UC버클리대학).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개념이 빠져나간다. 마음이면 심리학? 아님 신경과학 또는 뇌과학? 한국 인지과학의 대부인 성균관대 이정모 명예교수는 저서 ‘인지과학: 과거-현재-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개념을 정리했다.

    ‘인지과학은 마음(Minds)에 대한 과학이다. 여기서 마음은 이성이나 감성이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물론 인공물(컴퓨터, 사회체제 등)을 모두 아우른다. 접근법도 다르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오로지 행동만을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본다. 인지과학은 마음을 일종의 정보처리 체계로 여기며, 과학적 탐구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간 인간의 마음은 블랙박스였다. 눈에 보이지 않아 객관적인 연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사유에 의존해 이론을 전개했고, 심리학에서는 행위의 결과에 주목했다. 이런 마음에 과학의 렌즈를 들이댄 것은 기술의 발전 덕분. 예컨대 뇌 반응을 살피는 신경과학과 정교한 기계 조작이 가능한 전기공학 기술을 활용, 사지 마비 환자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휠체어를 개발하는 식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김세균 교수는 “휴머니티에 반한다는 기존의 과학기술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터넷 게임이나 내비게이션 등 인공물은 마음 한 부분을 담아내고 있다. 인지과학은 사람을 더 잘 알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인지과학은 1980년대 초 일부 학자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건 2, 3년 남짓이다. 기업들의 필요가 어느 정도 촉매가 됐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알아야 좋은 기술이 나온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인지과학에 눈을 돌린 것. 이정모 교수는 “애플 제품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골라 쓰는 시스템은 인간의 편리를 높인다. 이제 디지털 기기는 기술뿐 아니라 사람을 알아야 성공하는 시대”라고 했다.

    각 학문에서 인지과학이 구현되는 형태는 다양하다. 인지공학, 인지경제학, 인지심리학, 인지법학, 인지문학 등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인간 요인’을 고려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행동경제학도 인지과학의 한 줄기. 성균관대 경제학과 김광수 교수는 “그간 경제학의 주류는 합리성을 강조했는데 행동경제학은 다소 비합리적인 인간의 판단과정에 주목한다. 연구를 하다 보면 막히거나 주제 개척이 쉽지 않다. 그럴 때 인지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뜬구름을 걷어내고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이렇다. 인지공학은 인간과 기계의 연결시스템의 효율을 목표로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시스템, 애플의 매킨토시는 인지심리학자와 인지공학자가 다수 참여해 탄생한 히트작이다. 인지교육은 인지적인 습관과 전략을 개선하면 학습능률이 오른다는 학습전략과 관련해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주류인 교육행정학과 교육철학을 벗어나 교육심리를 연구하는 ‘마음두뇌교육협회’가 생겼다. 인지법학은 기소·증언·변호·재판 등에서 일어나는 당사자들의 인지과정에 주목하며, 인지정치는 유권자들의 심리분석을 시도한다. 인지종교학은 사람이 신의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을, 인지문학은 텍스트를 읽고 감동을 느끼는 과정을 연구한다.

    하지만 국내 인지과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보다 40년 정도 뒤처지는 수준. 현재 국내 대학에 개설된 학부과정은 없다.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부산대 등에 대학원이 개설된 정도다(뇌인지과학 제외). 그것도 모두 여러 학과가 동참하는 협동과정 형태라 불안정하다. 자연히 전문가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이 교수는 “초기 인지과학이 정착하려면 행정과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보수적 학계, 인지과학에 소극적

    “한국에서는 행정체계가 갖춰지지 않으면 학문의 발전이 힘들다. 독립된 학과가 아닌 협동과정 형태라 관심 있는 교수들이 잠깐씩 강의하는 정도다. 한국 대학은 취업 문제가 걸려 있어서 본질적인 학제 개편이 이뤄지기 힘들다. 지난해 WCU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사정이 좋아지리라 믿는다. 지원 문제도 크다. 미국은 1970년대 파격적인 지원을 받아 인지과학이 부쩍 성장했다. 그러나 교과부는 당장의 결과물이 없어 예산 지원이 힘들다고 말한다. 교수들의 어려움도 있다. 관심 갖는 학자는 많은데 강의를 하면서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논문을 쓰기가 쉽지 않다. 논문 실적에 대한 압박도 있으니까.”

    국내의 학계 풍토는 인지과학이 뿌리내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학제를 넘나드는 인지과학은 제약이 많다. “융복합적인 인지과학이 발달하면 학제 개편이 이뤄질지 모른다”는 교수들의 섣부른 정서도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학자들은 인지과학의 매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세계 학계는 인지과학이 복합 학문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학문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수천 년을 달려왔다. 인지과학의 성장이 가져올 미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참고도서· ‘융합 인지과학의 프런티어’(성균관대 출판부), ‘인지과학 : 과거-현재-미래’(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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