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0

2010.06.07

‘원효의 화쟁사상’과 불신 넘치는 사회

사사건건 대립 날이 갈수록 심각 … 사회통합 갈구 1400년 전 그 정신 살아나야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6-07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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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의 화쟁사상’과 불신 넘치는 사회

    중국 불교 이론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며 해동종을 개창한 원효(왼쪽). 원효와 함께 두 차례 도당유학을 나섰던 의상.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내 찍으리(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신라가 삼국 통일을 앞둔 통일전쟁기에 서라벌 저잣거리에서 한 승려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뭇 사람은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은 이 노래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만나 현자(賢者)를 낳으려고 한다. 나라에 큰 인물이 있는 것보다 유익한 것은 없다”라며 궁리(宮吏)를 보내 그 승려를 데려오게 했다. 마침 승려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는데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瑤石宮)으로 인도해 옷을 말렸다.

    요석궁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은 무열왕의 둘째 딸 과공주(寡公主)가 있었다. 승려가 궁에 묵은 뒤 공주에게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총명해 경사(經史)에 통달, 이두(吏讀)를 정리하고 해동 경학(經學)의 비조가 됐다. 그 후 실계(失戒)한 승려는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어야 생사에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무애가(無歌)’를 부르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녔다.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는 그를 통해 몽매한 중생은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됐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를 외우게 됐다.

    그 승려는 누구인가. 한국 지성사는 물론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화정국사(和靜國師) 원효(元曉, 617~686)다. 위대한 파계승 원효의 생애를 살펴보자.

    당나라 유학길에 첩자로 오해받아



    원효는 삼국이 한강유역을 놓고 쟁패하던 통일 전 진평왕 39년(617)에 경주 부근의 압량 불지촌(押梁 佛地村·현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의 성은 설씨(薛氏)로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로 6두품 가문이었다.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으로, 그는 소년 시절 화랑의 낭도로 통일전쟁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진덕여왕 2년(648) 다소 늦은 32세에 황룡사로 출가했다. 원효는 스승을 정해놓고 배우거나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불전을 섭렵하면서 용맹 전진했다. 34세(650년)에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당시 풍조인 도당유학(渡唐留學)을 시도해 요동까지 갔으나, 고구려의 해상봉쇄 정책 때문에 변경 수비군에게 첩자로 붙들려 수십 일간 갇혔다가 귀환했다.

    10년 후 다시 의상과 해로를 통해 당나라로 가는 도중 당항성(黨項城·현 경기 남양만)에서 배를 기다리다 폭우를 만나 한 집에 묵었다. 밤중에 목이 말라 옆에 있는 바가지의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깨어 보니 그곳은 고총(古塚)이었고, 지난밤 달게 마신 바가지 물은 촉루(·해골)에 괸 빗물이었다. 원효는 구역질이 났으나 곧 똑같은 물임을 깨닫고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라는 유심소조(唯心所造)를 터득한 뒤 의상과 헤어져 분황사로 돌아왔다.

    백제 멸망 후 문무왕 2년(662) 겨울,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김유신이 당나라에서 보낸 비표(秘票·암호문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관에 처하자 원효가 그것을 해독해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는 김유신이 원효의 고향인 압량주 군주(軍主)를 지내면서 맺은 인연 덕분이었다. 이 무렵 설총이 태어났고, 원효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찬술했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주석을 왕실과 여러 대신, 고승에게 강해(講解)했는데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해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의 입에서 찬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강설이 끝난 뒤 원효가 “지난날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그 속에 끼일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 하자, 여러 고승이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뉘우쳤다.

    ‘원효의 화쟁사상’과 불신 넘치는 사회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론해 좌중을 압도했던 황룡사터. 당간지주만이 빈 터를 지키고 있다.

    독자적 사상체계 구축 … 해동종 개창

    당시는 중국에서 밀려오는 성당문화(盛唐文化)로 주눅이 든 시기였다. 하지만 원효는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중국 불교 이론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며 해동종(海東宗)을 개창했다.

    원효의 불교사상은 크게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무애사상(無思想)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특히 화쟁사상은 서로 다른 쟁론을 화합하려는 것으로 유(有)와 무(無)의 대립된 견해를 귀일시킨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대승불교 철학의 2대 조류를 이룬 중관파(中觀派·삼론종)의 부정론과 유식파(唯識派·법상종)의 긍정론의 대립을 비판, 극복하면서 불이(不二)의 무대립론(無對立論)을 주장했다.

    원효는 왕실과 혼인한 신분이었으나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기생집을 드나들었고 여염집에 유숙하기도 했으며, 사당에서 가야금을 탔다. 천민 뱀복이의 어머니가 죽자 직접 시신을 멨고, 어떤 때는 밥을 먹다가 밥상을 내동이치고 입 안의 물로 불을 끄는 등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자세로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삶을 견지했다. ‘원효 앞에 원효 없고, 원효 뒤에 원효 없다’라는 불세출의 큰 별이 됐다.

    이러한 원효의 삶은 진골 출신 의상이 도당유학을 하고 돌아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해동 화엄종을 개창, 전제왕권 강화에 기여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문도 양성을 하지 않은 원효와 달리 의상은 왕실과 귀족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문도를 양성해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아성(亞聖)으로 불린 의상10철(義湘十哲)의 제자를 두었다.

    그러나 원효의 저술 중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중국 화엄학을 체계화한 법장(法藏, 643~712)에게 영향을 주었고,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원효의 손자이자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이 일본에 사행(使行)했을 때, 일본에서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보았으나 그분을 뵙지 못해 한이었는데 신라국 사신인 설 판관이 원효거사의 손자라니 매우 기쁘다”라며 환대를 받았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본토인 인도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4 의해(義解) 편에 원효를 ‘원효불기(元曉不羈)’라고 해 굴레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申采浩)도 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신라 하대부터 고려 중엽까지 600년은 원효의 사상이 지배했고, 원효가 희랍 철학의 강단에서 태어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설파했다.

    4대강 살리기, 세종시 문제, 천안함 폭침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6·2지방선거 등 남북, 남남문제로 국론 분열과 좌우 갈등이 첨예한 현재는 원효가 살았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토록 사회 통합을 갈구했던 원효의 화쟁사상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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