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0

2010.06.07

한명회 셋째 딸로 살다 세조의 큰며느리로 죽다

못다 핀 꽃 장순왕후의 공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6-07 13: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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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 셋째 딸로 살다 세조의 큰며느리로 죽다

    (왼쪽 사진)곡장으로 둘러싸인 능침. (오른쪽 사진)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을 가리켜 파주 삼릉이라 한다. 공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 1450~1469)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 한씨를 모신 곳이고, 순릉은 제9대 왕 성종(成宗)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를 모신 곳이다. 영릉은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로 세자로 책봉됐다가 일찍 승하한 진종(眞宗, 추존)과 그 비(妃)를 모신 곳이다. 이 중 단릉인 공릉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에 술좌진향(戌坐辰向)으로 앉아 있다. 북서 방향에 자리 잡고 남동향을 바라보는 형태다.

    연성대군 낳고 산후병으로 16세에 요절

    장순왕후는 당대 최고의 처세가이자 책략가인 상당부원군 영의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셋째 딸이다. 부군인 해양대군(예종)은 1457년(세조 3) 겨울, 형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9세에 세자가 되었다. 해양대군의 세자 책봉에 적극적인 사람은 한명회였다.

    3년 뒤 세자의 배필을 정할 때 허삼, 손선충 등은 딸을 숨겨놓아 조정에서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거부이자, 왕세자비라는 중책을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봄 병조판서이던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15세에 세자빈에 책봉됐다. 이때 해양대군은 11세였다. 세자빈 책봉 때 세조와 왕후가 친히 광화문에서 맞이하고 근정전에 나아가 한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했다. 세조의 책문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해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다. 효령대군 보(補)와 우의정 이인손 등을 보내 그대에게 책보를 주어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공경하고, 서로 도와서 궁중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왕업을 융성케 하라. 만 가지 교화가 시작되고 만 가지 복의 근원이 그대 한 몸에 매였으니 공경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이때 세자빈 집에는 면포 500필, 쌀 200석, 황두 100석을 내려주었다. 왕세자가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맞는 친영의(親迎儀) 때 서로 여덟 번 절하여(八拜禮) 이성 간에 결연의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왕궁을 향해 세자가 앞서고, 세자빈이 가마에 오르고 내릴 때 가마의 발을 세자가 친히 거두게 했다. 또한 동향에서 서향하여 선 신랑과 서향에서 동향하여 선 신부가 첫날밤 교배(交拜·절을 주고받는 예)를 마치고 술과 찬(饌·음식)을 나눈 뒤 신방에 드는 의식인 동뢰연(同牢宴)이 열렸다. 이때 술은 금으로 만든 잔에 두 번 마시고, 나중에 근(·작은 표주박을 둘로 쪼개 만든 잔)에 합잔을 해 세 번에 걸쳐 마신 뒤 두 번 절하고 합방을 한다.

    이튿날 시집온 세자빈이 아침 일찍 시부모를 뵙는 조현례(朝見禮)를 행한다. 이때 세자빈은 왕과 왕비에게 조율(棗栗·대추와 밤)을 드리고 네 번 절한다. 혼례 3일째에 세자빈은 왕궁으로 시집와서 처음 왕과 왕비에게 어선(御膳·상 차리는 예)을 드리는 관궤례(饋禮)를 한다. 또한 왕세자와 세자빈이 세자빈 집으로 가서 빈의 부모에게 인사하는 회문례(回門禮)를 한다. 이해 8월 한명회는 황해·평안도관찰사로 발령 나서 왕세자가 모화관에서 전별잔치를 베풀었다.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7개월 만인 세조 7년(1461) 11월 30일 밤, 세자빈이 원손(인성대군)을 낳으니 세조가 기뻐서 한명회에게 “천하의 일 가운데 무엇이 오늘의 경사보다 더하겠는가?”라며 술을 올리게 하고, 밤새워 원자와 산모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러나 닷새 뒤인 1461년 12월 5일 왕세자빈이 관저에서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였다. 어렵게 얻은 인성대군도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한명회 셋째 딸로 살다 세조의 큰며느리로 죽다

    능침에서 본 공릉 전경.

    계유정난과 단종의 폐위 사건 등 어렵게 정권을 잡은 세조는 두 살 위의 지략가 한명회를 국정운영 파트너로 삼았다. 한명회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과거시험의 운도 없어 세월을 보내다가 문음제도(공신의 자손은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에 따라 문종 2년(1452) 37세의 늦은 나이로 개성에 있는 경덕궁 관리직에 올랐다.

    권람의 추천으로 수양의 책사가 된 한명회는 1453년 계유정난 때 무사 홍달손을 이용해 정적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세조가 등극하면서 정권의 핵심에서 13년간 좌부승지·도승지·이조판서·병조판서·관찰사·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 거치며 조정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한명회는 해양대군(후에 예종)과 첫째(셋째라고도 함) 딸 한씨(장순왕후)를 혼인시켰다. 또한 1467년 영의정으로 있을 때 넷째 딸(공혜왕후)을 덕종(세조의 큰아들)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후에 성종)과 혼인시켜 겹사돈이 되면서 권력을 이어갔다. 즉 한명회는 열한 살 터울의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세조와는 정치적 동반자이면서 예종, 성종 두 대에 걸쳐 왕의 장인으로 네 번이나 일등공신에 추대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세조가 시호 내리고 장례 주관

    시아버지의 사랑, 친정아버지의 후광을 받고도 요절한 장순왕후에 대해 세조와 한명회는 얼마나 애석했을까. 이러한 애틋함으로 세조는 온순하고 아름답고 어질며 자애롭다는 뜻의 장순(章順)이란 시호를 내리고 세자빈 묘를 조성했다. 그러나 예종도 왕이 된 지 13개월 만에 서거하고 조카인 성종이 왕위를 잇자, 1470년 시어머니인 대왕대비(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장순왕후의 능호를 공릉이라 추숭했다. 이때 성종의 어머니이며 의경세자의 부인인 수빈 한씨는 인수왕비로 추숭하고, 의경세자는 의경왕으로 추존하며 능호를 의경릉 또는 경릉(敬陵)이라 했다. 이는 딸에 대한 한명회의 애정과 권력욕에서 나온 지략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유교에서 일부일처(1제 1후)의 원칙을 내세워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를 정비로 추숭하고, 뒤에 왕비가 된 안순왕후는 계비가 됐다.

    예조에서 공릉과 경릉의 존호를 높이고 의물인 석물을 갖춰야 한다고 올리니, 정희왕후는 “신도는 고요함을 숭상하는데 두 능이 오래돼 동요시킬 필요가 없으니 잡물을 가설치 못한다”고 명했다.

    큰며느리 장순왕후의 장례를 주관한 세조는 자신의 형수이며 문종의 세자빈이었던 단종의 모친 현덕빈의 예에 따라 상례를 치르게 했다. 성빈(成殯·빈소를 차림)은 한명회의 뜻에 따라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5일간 왕과 왕비는 조회와 저자를 정지했다. 겨울이라 구의(柩衣)를 하나 더하려 하니 세조가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속히 썩게 하는 것이 좋다”라며 못하게 했다. 석곽 만드는 것도 경계하고, 사치하는 것은 “진나라 목공(穆公)이 순장(殉葬·장례 때 하인 등을 생매장함)하고 진시황이 은으로 하수(河水·진시황 능에 수은으로 강물을 만들어 넣었다는 고사)를 만든 뒤에야 만족할 것”이라며 역시 금지했다. 세조는 강회백 모친의 무덤이었던 파주 조리면 박달산 지맥의 보시동(普施洞)에 세자빈 터를 잡아 안장했다.

    공릉은 그리 높지 않은 용맥이 능역을 감싸는 온화한 지형으로 북·동·서쪽이 능선으로 담을 쌓고 있어 북서풍을 막아주며, 남서쪽이 약간 열린 형국이다. 임진강에서 올라오는 참게가 능역의 개울에서 목격된다고 하니, 수도권에 있는 맑고 깨끗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명회 셋째 딸로 살다 세조의 큰며느리로 죽다

    ① 공릉의 신계(神階) 조각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② 옥개석과 상륜부가 커서 비례감이 떨어지는 장명등. ③ 공릉의 문석인은 머리 부분이 크고 조각이 단순한 편이다.

    얼굴이 몸통에 비해 유난히 큰 문석인

    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가 ‘ㄱ’자로 꺾인 점이 특징이다. 이는 능역이 협소한 경우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조영한 것으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과 단종의 장릉, 선조의 목릉에서 볼 수 있으나 흔하지는 않다. 공릉 능침 뒤에서 멀리 조산을 바라보면 봉분과 장명등, 정자각이 일직선으로 축을 이루는 경관적 특성을 볼 수 있다.

    공릉의 봉분은 당대 세자 묘로 조영된 덕종(경릉)의 봉분처럼 규모가 큰 편이다. 병풍석이 없는 세자빈 묘의 원(園) 형식으로 난간석·병풍석·망주석이 모두 생략됐고, 무석인도 없다. 곡장 안 봉분 둘레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한 쌍이 바깥을 수호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능역은 일반적으로 석양·석호가 2쌍 4마리인 점과는 다르다. 석양은 봉분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호와 같이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능침 상계 앞 가운데 놓인 혼유석이 550여 년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듯하다. 장명등은 왕릉과 일품(一品) 이상 사대부 묘에만 사용하는데 장명등의 화사석(火舍石·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에는 사각의 창을 뚫고, 옥개석을 올린 뒤 그 위에 보주가 달린 상륜을 얹었다. 장명등은 팔각으로 규모가 크며, 옥개인 지붕돌과 화사석에 비해 간석·하대부 등 기단부가 다른 능보다 낮아 안정적이지 않다.

    문석인은 장명등·석마(石馬)와 함께 중계(中階)에 놓여 있다. 문석인은 손에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이 몸통에 비해 유난히 크다. 얼굴과 마음이 아름다웠던 장순왕후에 대한 애절함을 달래기 위해 얼굴을 크고 정밀하게 표현했는지 조각가의 마음을 알고 싶다.

    능침 아래 정자각 서북쪽에 있는 예감(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태워 묻는 곳)이 다른 곳과 달리 투박하고 정감 있다. 월대 위의 정자각은 앞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그리 크지 않아 세자빈 묘 형식에 어울린다. 정자각 신문 뒤의 신교와 모서리 배수구를 공들여 조영했다. 공릉의 참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된 듯하다. 없어진 금천교와 일부 훼손된 재실의 원형 복원이 아쉽다. 공릉의 비석은 영조(영조 52년, 1776)까지는 없었으나, 이후 순조 17년(1817) 공릉과 영릉에 표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영조 때 공릉과 순릉에 호랑이가 횡행해 포수를 보내 잡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공릉을 중심으로 한 파주 삼릉은 조용히 사색하며 자연생태의 모습을 보고 역사를 탐미하는 장소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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