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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6·25 특집 02

“돌격 앞으로!” … 잊힌 하루살이 소위들

육군종합학교 출신 노장들 6·25 회한 1년간 32기 7288명 임관 역사 이끌어

“돌격 앞으로!” … 잊힌 하루살이 소위들

“돌격 앞으로!” … 잊힌 하루살이 소위들
초여름 햇살을 받아 높게 빛나는 국립이천호국원의 충용탑(忠勇塔). 올 6월에도 어김없이 노병들은 탑 뒤편에 빼곡히 적힌 7000여 명 전우의 이름을 일일이 쓰다듬는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부터 단 1년간 씨를 뿌렸던 육군종합학교(이하 육종)는 60년간 근역(槿域)을 뒤덮을 만큼 많은 꽃을 피웠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육종을 새까맣게 메웠던 젊은 패기의 그들은 이제 평균연령 82세의 백발노인이 됐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를 이야기하는 그들의 가슴은 아직도 뜨겁다.

“명예롭게 앞장서 싸우겠다”

육종은 6·25전쟁 때 초급 장교를 보충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학교로 1950년 8월 15일부터 1951년 8월 18일까지 총 32기 7288명을 배출했다. 당시 전선에서 활약한 소대장의 70%가 이곳 출신일 정도로 육종은 막중한 임무를 해냈다. 그 결과 1951년 7월 14일 교암산 전투 중 중공군의 공격을 육탄으로 막다 전사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32기 김교수 대위 등 2700여 명이 6·25전쟁으로 무공훈장을 받았고, 1300여 명이 전사했으며 2200여 명이 부상했다. 육종 출신 3명 중 1명 이상이 이 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러운 북한의 남침으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지자 남한군은 계속 군대를 증설했다. 그러면서 기존 장교를 군대장으로 승격하니, 소대를 직접 지휘할 소대장급이 부족했다. 게다가 낙동강 방어전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8월 중순까지 초급 장교의 60%가 희생됐다. 신속하게 전투를 지휘할 소대장을 긴급 수혈하기 위해 8월 15일 부산 동래에 육종이 문을 열었다.

“당시 총알이 ‘쏘~위~’ 하고 날아간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소위가 많이 죽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30여 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돌격 앞으로!’ 하는 사람이니 가장 죽기 쉬웠지요.”(16기·육종 전우회장 이영돌)



그럼에도 ‘어차피 일반 병사로 전쟁에 끌려나갈 거라면 명예롭게 앞장서 싸우다 죽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이 육종 입관시험에 응했다. 중학교(현 고등학교) 이상 나온 사람만 응시 가능했고 시험과목은 수학, 영어, 국어 등이었다. 16기 백락만 씨는 “우리 기수에는 500여 명이 응시해 150명 정도만 붙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교사, 학생, 대학교수 등 1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까지 다양한 층의 지식인이 육종에 입학했다.

이후 전시 상황에 따라 4~9주간 훈련을 받았다. 본래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장교가 되려면 2, 3년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그들은 짧은 시간 안에 소대장의 조건을 갖춰야 했기에 교육 강도가 셌다. 취침 중이던 오전 1시에 갑자기 신호가 울리면 속옷만 입고 야산에 올라가는 건 기본.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훈련을 받다 보면 구역질이 나고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전시라 영양 상태도 안 좋고 보급품도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훈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소대장은 군사 30여 명의 생명을 쥐고 있는데, 제대로 배우지 않아 전쟁터에서 실수를 하면 모두가 죽는 겁니다. 그러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지요.”(3기 전영태)

그들에게 배고픔은 가장 큰 적이었다. 하루 종일 훈련을 받지만 식사는 밥 한 줌에 시래기 몇 가닥이 둥둥 뜬 국 한 국자가 전부였다. 일주일에 단 하루 주말에 가족이 음식을 싸와 기름진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이미 굶주림에 익숙한 몸은 그런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 곧 공중변소에는 길게 줄이 늘어섰다. 그마저도 면회 올 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일. 가족이 없거나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그 광경을 멀리서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하루빨리 훈련을 마치고 전쟁터에 나가고 싶었어요. 그러면 이 고통스러운 훈련 안 받고 밥이라도 많이 먹으며 싸우다 죽을 수 있잖아요.”(16기 안재영)

30여 명 부대원 목숨이 내 손에

“돌격 앞으로!” … 잊힌 하루살이 소위들

전영태, 전제현, 이영돌 씨 등 육종 출신 노병들(왼쪽부터). 60년이 지나도 당시를 잊을 수 없다.

짧은 훈련을 마친 이들은 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눈앞에 펼쳐진 전쟁터, 포탄이 날아드는 그 속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교본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임관하고 처음 중대장에게 인사하러 가는 길에 포탄을 맞고 즉사한 전우도 있었다. 그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전선에 배치돼 전진했다.

하루하루 힘겹게 싸워 만주 국경까지 진군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38선 부근까지 후퇴했다. 밀고 올라갔던 육종 출신 소대장들은 힘도 못 써보고 다시 내려왔다. 5기 이동욱 씨는 아직도 흥남 철수를 잊지 못한다.

“함경북도 백암까지 갔다 중공군에게 밀려 내려왔어요. 북한 주민들이 졸졸 따라오는데 흥남에서 탈 수 있는 배는 한정돼 있고,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고…. 살겠다는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떼어놓는데, 정말 피비린내가 났지요.”

중공군의 집요한 반격에 육군은 휴전선을 앞두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혈전을 치렀다. 이 4개월간의 싸움은 육종 출신 400여 명이 전사할 정도로 희생이 컸다. 당시 연락장교였던 11기 채충기 씨도 왼쪽 무릎에 총상을 입었으나 병원으로 후송되지 못하고 대대에서 응급처치만 받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계속 다른 부대의 연락을 받으며 작전을 지휘했다. 모자에 붙일 계급장이 부족해 대신 밥풀로 표시할 정도였으니 무기가 제대로 보급됐을 리 만무했다.

“대전차부대 소대장으로 있었는데 우리 육군은 전차가 없고 인민군은 소련제 전차가 230대나 있었습니다. 전차가 없으니 적의 전차에 육탄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적의 부서진 전차를 발견하면 고쳐서 몰고 다녔습니다.”(이동욱)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30여 명의 소대원을 책임져야 했다. 철수 당시 병사들은 10분간의 휴식이 주어지면 눈으로 꽁꽁 얼어붙은 길에 벌렁 누워 코를 골고 잤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분대장이 부대를 버리고 도망가기도 다반사였다. 일반 병사보다 어렸던 20대 초반 소대장들도 지친 몸을 이끌며 환자를 보살피고, 전쟁에 나서지 않는 사람들을 다그치며 군을 이끌었다.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는 역할도 그들의 몫이었다.

마지막까지 전세를 잡기 위해 그들은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51년 11월 제5연대 4.2인치 중박격중대 소대장이었던 안재영 씨는 동료들과 함께 적군 4명을 생포하고 무기 5정을 노획해 미10군대장 바이어 소장에게서 미국 훈장인 은성훈장(실버스타)을 받았다.

“나는 월남전에 나갔다가 브론즈스타를 받았는데, 실버스타는 정말 대단하지요. 그만큼 6·25전쟁 때 육종 출신들은 물불 안 가리고 싸웠습니다.”(전제현)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되고 8월 육종의 모집은 중단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육군사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육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육종 출신들은 여전히 군 안팎에서 전천후로 활약했다. 그리고 휴전 이후에도 임관자의 36%, 즉 2600여 명이 군에 남아 대위, 중위로 진급했고 중대장, 대대참모, 연대급 이상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이들은 전쟁 참여 경험을 살려 군을 이끌었고, 특히 1967년 월남전에는 육종 출신 400여 명이 소령 이상으로 베트남에 파견돼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2군 사령관을 지내고 4성 대장까지 오른 9기 김홍환 씨를 포함해 총 127명이 장군을 달았다.

대한민국 중추로 활발한 활동

“돌격 앞으로!” … 잊힌 하루살이 소위들

2009년 10월 국립이천호국원 충용탑을 찾은 육종 전우회.

전역한 4000여 명은 사회에 진출했다. 본래부터 고학력자 위주였고 전쟁을 지휘한 큰 경험을 했기에 각계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특히 교육계에 몸담은 사람이 333명이나 되고 관계, 의료계, 금융계 등으로 간 사람도 많다. 국회의원 15명, 대학 학장 28명을 배출했다. 구자춘 전 내무부 장관(9기), 권영각 전 건설부 장관(9기),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국회의원(11기), 김만기 전 육군 헌병감·감사원 사무총장(13기), 황경로 전 포항제철 회장(22기), 염보현 전 서울시장(26기), 통일벼를 개발한 정근식 박사(27기),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27기) 등도 육종 출신이다.

군과 사회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한 육종 전우들. 하지만 1985년을 마지막으로 육종 출신은 모두 군을 떠나고 사회에서도 하나 둘 은퇴했다. 육종의 노고를 기리며 1971년 3월 전우회가 창립돼 현재 15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데, 이들은 해마다 추모제를 열고 기념비도 세웠다. 1995년에는 전우들의 회고를 담은 육종 실록도 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육종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수두룩하다던데 육종은 기억이나 하겠어요? 우리 중에는 제대로 훈장, 참전수당 못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국가를 위해 싸워 자랑스러웠으니 그런 공과를 따지지 않았던 거지요. 하지만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작년만 해도 50여 명의 회원이 국립현충원으로 갔습니다. 지금이라도 국민이 우리 희생을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이영돌)

그들은 군인 선배로서, 천안함 사건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군을 믿기는커녕 의혹부터 제기하는 국민, 정부가 야속하다.

“전쟁 때 사람들이 가장 믿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소대장, 중대장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지휘하므로 무조건 믿어야 하지요. 군인보다 더 나라를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못된 놈들한테 어떻게 되갚아줄지,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이 다시는 안 올지를 어서 연구해야 하는데 왜 엉뚱한 데 비난하는 건지 안타까울 뿐입니다.”(전제현)

아직도 노장들의 머릿속엔 제 손으로 지켜낸 대한민국만이 가득했다.



주간동아 2010.06.07 740호 (p62~64)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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