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0

2010.04.06

“일본이 ‘안중근의 날’ 크게 외칠 것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 님이 남긴 애국혼 자손만대의 귀감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3-31 09: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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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안중근의 날’ 크게 외칠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동생인 정근, 공근과 홍석구 신부를 만나 유언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0년 3월 26일. 1909년 10월 26일의 ‘하얼빈 의거’ 5개월 만에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1879~1910)에게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중국 뤼순(旅順)감옥 형장은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안중근은 형장으로 나가기 전에 마지막 유언을 묻는 일본 검찰관에게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검찰관이 당황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오전 10시 사형 집행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안중근은 하루 전날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면회할 때 건네준, 어머니와 아내가 밤새 지은 한복을 입고 의연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쓰러져가는 조선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안중근 순국 다음 날 부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뤼순에 왔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민족의 영웅이자 불멸의 대한국인 안중근의 31년 짧은 삶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안중근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성리학을 전래한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26세손으로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趙)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兒名) 겸 자(字)는 응칠(應七)이고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Thomas·도마)다.

    7세 때(1885년) 부친 안태훈이 일가 70~80명을 이끌고 세거(世居)하던 황해도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했다. 안중근은 소년 시절에 거기서 유교 경전과 ‘자치통감(資治通鑑)’ ‘조선사(朝鮮史)’ ‘만국역사(萬國歷史)’ 등을 읽었고, 집안에 기식(寄食)하던 포수군(砲手軍)을 따라다니며 사격술을 익히고 사냥을 즐겼다. 그 후 16세 때(1894년) 한 살 위인 김아려(金亞麗, 1878~1946)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다.

    그해 황해도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 2만여 병력이 황해도 일원에서 기포(起包)했을 때, 안태훈은 70여 명의 포수군과 인근의 민병을 조직해 해주감사(海州監司)를 도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박석골 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해 전공(戰功)을 세웠는데, 당시 중근이 붉은 옷(紅衣)을 입어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했다.



    안향의 26세손 … 성격 급해 ‘번개 입(電口)’ 별명

    17세 무렵(1895년) 안중근은 ‘벗을 얻어 의를 맺는 일(親友結義)’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기(飮酒歌舞)’ ‘총으로 사냥하기(銃砲狩獵)’ ‘준마 타고 달리기(駿馬騎馳)’ 등을 즐겼는데, 성격이 급해 친구들에게서 ‘번개 입(電口)’이란 별명으로 불렸고 가끔 기방에도 출입하는 호방함을 보였다.

    18세였던 1896년 12월 초, 안태훈은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사람을 보내 당시 안악군 용문면 매화리에 있던 매화동 본당의 빌렘(J. Wihelm·홍석구) 신부를 청계동으로 오게 해 천주교에 입교했고, 이듬해(1897년) 1월 중순 안중근은 빌렘 신부에게서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 후 28세 때(1906년)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했는데 이 무렵 그는 서우학회(西友學會, 후일 서북학회에 통합)에 가입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진남포 본당에서 운영해오던 돈의학교(敦義學校)의 재정을 부담하며 제2대 교장에 취임했고, 본당에 설치한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校)의 재정도 운영했다.

    29세였던 1907년 1월 31일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안중근은 이 운동의 관서지부(關西支部)에서 활동했고, 그해 겨울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 건너가 그곳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부대 창설에 대한 설득 작업을 해 이범윤(李範允)의 동의를 받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했다.

    “일본이 ‘안중근의 날’ 크게 외칠 것이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감옥 묘지로 발인하는 장면.

    30세였던 1908년 초에는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면서 무기, 자금 등을 확보해 국외의병부대(國外義兵部隊)를 조직했는데 총독에는 이범윤, 총대장에는 김두성(金斗聖)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중장(參謀中將)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의병과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해 두만강 근처에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도모했다. 이상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전 안중근의 대략적인 연보다.

    하얼빈 의거 며칠 후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검찰관의 심문을 받고 당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악상으로 고종 폐위와 명성황후 시해,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등 15개 항목을 열거했다. 1909년 11월 3일 안중근은 뤼순감옥에 수감됐는데, 이날 한국의 황태자는 일본 황태자와 함께 이토의 미망인에게 조문하러 가 상반된 장면을 연출했다.

    1910년 2월 7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1회 공판이 열리고 14일 오전 10시에 안중근 사건의 최종 판결인 제6회 공판이 개정됐는데 재판장은 일본 형법을 적용해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극심한 형은 없느냐?”라고 말하면서 의연한 자세를 견지했다.

    일본은 유해기록 공개해 오욕의 역사 청산해야

    재판이 끝난 뒤 감옥으로 돌아와서는 “일본국 4000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외칠 날이 머지않을 것이다”라고 자위하면서 “나는 과연 큰 죄인이다.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약한 한국의 인민이 된 죄로다”라고 말했다.

    1910년 3월 15일, 안중근은 3개월 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서둘러 마무리지었다. 특히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상고도 포기하고 사형 집행을 보름 정도 연기해달라고 탄원했으나 묵살됐다. 이 무렵 안중근이 갇혀 있는 감옥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이 그에게 붓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해 안중근은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등의 유묵(遺墨) 200여 점을 남겼다. 사형을 앞둔 시점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엄한 처신이었다.

    20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뤼순 일아감옥구지박물관(뤼순감옥)에 안중근전시관(공식명칭은 국제항일열사전시관)이 마련됐고, 올해 순국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가 남북한 공동 추모행사를 열 예정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명동성당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한다고 발표했다. 저간 안중근 의사의 부활을 알리는 소설이 발표됐고 창작뮤지컬과 오페라가 공연되며 약 7m의 안중근 장군 동상이 건립될 예정이다.

    그리고 육군은 안중근 의사의 호칭을 장군으로 바꾸기로 했고, 하얼빈 의거를 하얼빈 대첩으로 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행사보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이 급선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아직도 찾지 못한 채 효창공원엔 그의 가묘만 쓸쓸히 놓여 있다. 그동안 유해 발굴 사업이 몇 차례 시도됐지만 증언에만 의존한 바 실효가 없었다.

    최근 일제 식민행정기관인 관동도독부의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보고서’와 ‘정황보고·잡보’ ‘증거품목록’ 등이 발견됐다. 이 자료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됐던 것을 보훈처가 찾아냈다. 올해 2010년은 한일강제합방 100주년,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지난해 일본 총리는 “역사를 직시할 용기가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일본은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성의 있는 자세로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를 밝혀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기록을 조속히 공개해 식민지 35년 오욕의 역사를 청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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