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0

2010.04.06

킬러본색 ‘박지성의 진화’

리버풀戰 결승골로 무공훈장 … 솔샤르·존슨·호날두와 ‘우연&필연’

  • 최원창 일간스포츠 기자 gerrard11@joongang.co.kr

    입력2010-03-30 18: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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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3월 22일(한국 시간) 100년 라이벌 리버풀을 상대로 역전 헤딩 결승골을 뽑아냈다. 시즌 초반 감기몸살과 오른쪽 무릎 부상의 후유증으로 벤치만 지킨 탓에 위기론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리버풀전에서의 득점은 단순히 한 골의 의미만 지닌 게 아니다. 숙적 리버풀전에서의 결승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무공훈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지성이 얻어낸 승점 3점 덕에 맨유는 단독 선두로 올라서면서 120여 년의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를 통틀어 최초의 리그 4연패를 노리고 있다. 만일 맨유가 대위업을 달성한다면 훗날 “박지성의 리버풀전 결승골이 4연패를 이뤘다”고 회고될 것이다. 역전 결승골을 뽑아낸 박지성의 포효를 지켜보면서 세 사람을 떠올렸다. 올레 군나르 솔샤르(38), 글렌 존슨(26·리버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5·레알 마드리드). 이들과 맺은 인연을 들여다보면 박지성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솔샤르 가르침 그대로 실천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워낙 앳된 얼굴이라 ‘동안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솔샤르는 노르웨이 출신으로, 13년간 맨유에서 126골(366경기)을 터뜨린 최고의 공격수였다. 특히 1999년 5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종료 1분을 남기고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골을 터뜨리며 ‘한 번의 터치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인 맨유의 전설이다.

    박지성이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고 한창 재활 중이던 2007년 가을, 은퇴 후 코치수업을 받던 솔샤르가 훈련하고 있던 박지성에게 다가와 자신의 슈팅 비법을 알려줬다. “골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패스가 오든지 그곳(골대)으로 차 넣으면 된다”는 것이 첫 번째 비법이었다. “생각하지 마라. 반복해서 훈련한 대로 기계적으로 슛하라”는 두 번째 비책을 들은 박지성은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가득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슛은 차는 것(kick)이 아니라 갖다 대는 것(touch)”이라는 말 속에는 골은 세게 차야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 곳으로 정확히 터치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박지성은 “솔샤르는 나와 키가 비슷하고 체격도 크지 않다. 나보다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골을 잘 넣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면서 “그때 솔샤르가 들려준 가르침을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가 없는 날 박지성은 공식 훈련을 마치면 개인 훈련을 한다. 골대를 앞에 두고 솔샤르의 가르침을 되뇌며 슛을 이어간다. 그는 “나는 이 나이에도 솔샤르를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늘 그곳에 있는 골대를 향해 정확히 골을 넣고 싶다”고 말했다.

    리버풀전에서 박지성의 골은 솔샤르의 ‘원샷 원킬’을 닮았다. 그에게서 팽팽하던 승부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부르는 해결사의 모습을 봤다. 그러고 보니 솔샤르 역시 11년 전 리버풀전에서 박지성처럼 역전 결승골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1999년 1월 FA컵에서 리버풀과 맞붙은 맨유는 일찌감치 마이클 오언(현 맨유)에게 실점했다. 후반 43분 드와이트 요크의 동점골이 터져나왔다. 무승부로 끝날 것 같던 경기는 종료 직전 솔샤르의 역전골로 2대 1 맨유의 승리. 박지성은 점차 솔샤르를 닮아가고 있다.

    전담 마크맨 존슨 고개 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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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렌 존슨

    존슨은 잉글랜드의 21세 이하 청소년대표를 거쳐 국가대표 수비수로 뛰고 있다. 맨유의 주장 게리 네빌의 후계자로 지목될 만큼 오른쪽 풀백으로 명성을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2003년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 구단주로 부임한 뒤 850만 파운드의 거액을 들여 가장 먼저 영입한 선수로, 포츠머스를 거쳐 지난해부터 리버풀에서 활약하고 있다.

    2009년 봄 영국의 대중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흥미로운 기사를 내놨다. ‘맨유를 이길 수 있는 팀’을 선정하면서 포지션별로 맨유의 스쿼드를 누를 수 있는 선수들을 지목한 것. 당시 박지성을 제압할 킬러로 지목된 수비수가 존슨이다. 신문은 “존슨은 박지성과 맞붙어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선수”라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존슨은 박지성 앞에서 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고, 데일리 메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버풀전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플레처가 오른발 크로스를 올리던 순간 루니는 리버풀의 수비수 아게르와 격하게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리버풀의 골문으로 향하자 박지성은 타이밍을 맞춰 골문으로 쇄도했다. 이때 존슨이 박지성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박지성이 몸을 날려 다이빙 헤딩슛을 시도할 때 존슨은 왼발을 내밀어 온 힘을 다해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박지성의 이마에 제대로 얹힌 공은 리버풀 골네트를 흔들었다. 존슨이 한 일이라고는 박지성의 왼쪽 이마에 상처를 낸 것뿐이었다. 왼쪽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상태로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던 박지성의 뒤편에 주저앉아 있던 존슨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날 줄 몰랐다.

    호날두 그림자 걷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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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지난 시즌 박지성은 ‘수비형 윙어’로 주목받았다. ‘수비형 윙어’는 공격 위치에서 상대의 역습을 끊고, 수비수들의 공격 가담을 돕는 현대 축구전술의 새로운 개념이다. 영국 언론들은 호날두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자 박지성의 가치가 떨어지리라고 예상했다. 호날두가 책임지던 득점의 공백을 메우려면 박지성처럼 수비적인 선수보다 공격적인 선수가 필요하다는 예상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시즌 초반 감기몸살과 오른쪽 무릎 부상의 후유증이 겹치면서 결장을 거듭했다. 간간이 교체 출전할 정도로 위상도 크게 줄었다.

    그러나 박지성은 이런 해석에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호날두의 이적으로 내 입지가 줄었다면 호날두가 있는 팀엔 모두 수비형 윙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도, 포르투갈 대표팀도 그렇지 않다. 맨유에서 내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의 엔진에 ‘수비형 윙어’와 함께 ‘센트럴 파크’를 새롭게 장착했다. ‘센트럴 파크’란 중앙 미드필더로 맹활약하던 그에게 영국 언론이 미국 뉴욕의 공원 이름을 따서 붙여준 별명이다.

    박지성은 3월 11일 AC밀란(이탈리아)과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때 중앙 미드필더로 나서서 밀란의 핵심 선수 안드레아 피를로를 원천 봉쇄한 데 이어 쐐기골까지 뽑아냈다. 리버풀전에서는 좀 더 공격적인 섀도 스트라이커로서 결승골을 넣었다. 2월 1일 아스널과의 홈경기에서는 40m를 질주한 끝에 오른발 끝으로 시즌 첫 골을 만들어냈다. 겨우 11초 만에 이뤄진 역습이 성공하자 호날두가 떠난 뒤 느려진 맨유의 역습 속도를 걱정하던 영국 언론들이 박지성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박지성은 영국 언론들이 드리운 ‘호날두 그림자’를 스스로 걷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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