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9

2010.01.12

40년 손맛, 인정이 듬뿍 “아 개운해”

용산 삼각지 옛집 국수

  •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blog.naver.com/foodi2

    입력2010-01-06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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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손맛, 인정이 듬뿍 “아 개운해”
    1인당 수십만 원짜리 만찬을 먹고도 속이 개운치 않아 헛구역질할 때가 있고, 몇천 원짜리 국수 한 그릇에 세상 시름 다 사라질 때도 있다. 인간이 돈과 쾌락만으로 사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서울 용산이 재개발되면서 이 일대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낡고 낮은 집들은 헐리고 번쩍이는 높은 건물들이 속속 들어선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불에 타 죽기도 했다. 돈을 좇으면서 사람을 잃고 있는 것이다. 언제 헐릴지 모르지만 육군본부를 뒤로한 삼각지는 옛 모습 그대로다. 대구탕 골목이 있고, 봉산집이며 평양집 등 30년 넘은 음식점들이 아직 영업을 하고 있다.

    삼각지 이면 도로로 들어서면 마치 1960년대 영화 세트장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낡은 집들 안쪽에 넓은 공터가 있다. 예전 전차가 다닐 때 종점 자리라고 한다. 한때는 넝마주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공터 한쪽에 ‘옛집’이라는 조그만 국숫집이 있다. 40년 가까이 된 가게다.

    ‘옛집’ 배혜자 할머니의 국수는 따스하다. 보통 멸치국수로 맛에서 그다지 특출난 것도 아니지만, 고향집 할머니나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있던 푸근함이 있다. 20여 년 전 ‘옛집’에서 벌어진 가슴 찡한 이야기가 전하는 덕이 크다(얼마 전 한 대기업의 광고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업에 실패한 한 남자가 있었다. 노숙자로 용산 일대를 떠돌았다. 배가 고파 식당가를 돌며 구걸했으나 문전박대만 당했다. 그러다 ‘옛집’ 앞에 이르렀다. 그는 이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고 도망칠 생각을 했다. 국수를 두 그릇 먹었다. 그러고는 냅다 뛰었다. 그의 뒤에서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괜찮다, 뛰지 마! 넘어져….”

    ‘도둑놈 잡아라’ 할 줄 알았던 할머니가 무전취식하고 도망가는 그를 오히려 걱정하는 게 아닌가.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사업 실패에 대한 절망, 사회의 냉대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파라과이로 이민 가서 사업에 성공했다. 15년 만에 귀국한 그는 방송에서 그때의 일을 말하며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할머니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행색으로 봐서 돈이 없는 줄 알았다. 한 그릇 더 달라기에 오죽 배가 고프면 그럴까 싶어 더 줬다. 그리고 먹고 뛰기에 다칠까봐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오늘도 국수를 말아 내신다. 몇 년 전 옆에 있던 국숫집이 폐업하면서 그 가게를 인수해 테이블 수를 2배쯤 늘렸다. 주방에서 일 보는 사람도 생겼다. 가게 커지고 사람 늘면 음식 맛이 변하게 마련인데 이 집 국수 맛은 여전하다. 진하고 개운한 멸치육수 맛은 서울에서 첫손가락에 들 만하다. 청양고추를 갈아 넣어 숙성한 독특한 양념장도 국물 맛을 돋우는 데 한몫한다.

    이 각박한 세상에 인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해주는 음식점이다. 그러나 개발 바람에 이 가게도 언제 사라질지 알 수가 없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삼각지역 1번 출구에서 우리은행 뒤쪽으로 돌아서 가면 골목 입구에 ‘옛집’이란 조그만 간판이 보인다. 02-794-8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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