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2

2017.04.05

특집 | 이상한 나라의 체육특기자들

수업과 담쌓은 ‘제2의 정유라들’

초중고생 때부터 코치와 학교 밖 훈련 일상화… ‘체육특기자 제도’ 대수술해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4-03 14: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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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최근 고교 졸업이 취소된 정유라(21) 씨가 고3 때 학교에 나온 모든 날짜를 합한 수다. 서울시교육청 감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때부터 각종 대회에서 입상한 ‘승마 유망주’ 정씨는 청담고 재학 시절 무시로 수업을 빠졌다.

    대회 참가, 훈련 등의 사유서를 제출하기만 하면 학교는 결석을 ‘공결’로 처리해줬다. 정씨가 고교 3학년 1년간 받은 공결일은 141일에 달한다. 서울시교육청은 이 중 105일이 허위 사유로 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학교가 사실 확인도 없이 공결 처리를 해준 셈이다.

    청담고는 이처럼 정씨를 방임했을 뿐 아니라, 주로 학교 밖에서 지낸 그에게 고3 2학기 체육교과 성적우수상까지 줬다. 정씨는 이후 이화여대에 합격했다. 이화여대 학생들의 문제 제기로 그를 둘러싼 입학 및 학사관리 부정의 일단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정씨는 여전히 수업을 빠지고 시험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서 이화여대 졸업장까지 거머쥐었을 개연성이 있다.



    “왜 나한테만 이래?”

    교육부가 3월 말 발표한 대학 체육특기자 학사관리 실태조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교육부는 정씨 사건 등으로 체육특기자 관리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높아지자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관련 조사를 벌였다. 특히 고려대, 성균관대, 연세대, 한양대 등 체육특기자가 100명 이상 재학 중인 대학 17곳을 집중 조사했다.



    조사관들이 1996년부터 2016년까지 이들 대학을 졸업한 체육특기자의 출석, 성적, 졸업 기록을 촘촘히 훑은 결과 이화여대 밖에도 ‘제2의 정유라’, 즉 학교에 적만 둔 채 수업과 시험을 등한시한 이가 적잖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을 비호한 ‘제2의 류철균’(전 이화여대 교수)도 많았다.

    구체적으로 학생 332명, 교수 448명이 지난 20년간 학칙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학점을 주고받는 데 연루됐다.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거나 출석 일수가 모자라는데도 학점을 취득한 경우, 시험에 대리 응시했거나 과제물을 대리 제출한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조사 대상자 중 394명은 ‘학사경고 누적 시 제적한다’는 학칙이 있는 대학에서 규정 이상으로 학사경고를 받고도 문제없이 졸업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제2의 장시호’인 셈.

    정씨의 사촌언니인 장씨는 1998년 연세대에 체육특기자로 입학한 뒤 3차례 학사경고를 받고도 제적되지 않고 졸업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고려대에서도 지난 20년간 236명이 같은 방식으로 졸업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다른 대학에서도 동일 사례가 다수 적발됐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현안 질의에서 장씨 사안에 대해 “법리 검토를 했는데 (수차례 학사경고를 받고도 제적되지 않은 것이) 장씨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학교의 잘못이라 졸업 취소 처분을 하는 것은 법리상 어렵다는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이번에도 학사관리 부실 문제에 연루된 체육특기자의 졸업을 취소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이번 조사 대상에 포함됐던 한 대학 보직 교수는 “교육부가 과거를 문제 삼아 이미 졸업한 체육특기자의 졸업을 취소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우리가 사랑해온 ‘스포츠 영웅’ 중 상당수가 고졸자가 될 것”이라며 “그간의 잘못을 이제부터라도 바로잡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오랜 관행을 문제의식 없이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와 학생에게 책임을 묻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상당수 대학 관계자는 “최근 학사관리 부실에 ‘칼자루’를 휘두르고 있는 정부가 실은 현재의 관행을 만든 주범”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정부가 1966년 국가대표 집단 훈련시설인 태릉선수촌을 세우고 서울체육중, 한국체육대 등을 차례로 개교하면서 엘리트 스포츠 선수 육성에 총력을 기울인 건 주지의 사실이다.

    정부는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를 대상으로 병역면제 혜택과 연금제도 등 ‘당근’도 마련했다. 이에 대해 허진석 씨는 저서 ‘스포츠공화국의 탄생’에서 “국제대회 메달리스트 등 엘리트 선수를 마치 독립운동가나 전쟁영웅 같은 국가유공자 내지 애국인사로 자리매김시킨 조치”라고 평하기도 했다.

    최근 문제가 된 우수 학생선수의 대학 입학 및 학사관리 특혜 관행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체대 교수는 이에 대해 “지금 정색하고 있는 교육부 관료를 포함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우리 모두는 운동부 학생들이 매번 수업을 빠지면서도 문제없이 진급하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명문대에 입학하는 걸 보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일부 교수와 학생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상황을 몰고 가면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김연아 다닌 고등학교에 스케이트장 있었나”

    이른바 ‘정유라 사건’에 연루돼 구속 기소된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과 류철균(필명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도 이와 유사한 논리를 펴는 것으로 알려졌다. 류 전 교수를 변호하는 전우석 변호사는 “류 전 교수에게 죄가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체육특기자가 학사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사례를 찾는 일이 더 어려웠던 게 사실”이라며 “류 전 교수는 정씨가 누구 딸인지 몰랐고 그에게 학점을 준 대가로 1원의 경제적 이득도 받지 않았으며 그저 관행에 따라 체육특기자에게 학점을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최 전 총장 측 역시 재판 과정에서 교육부 실태조사 내용을 언급하며 “체육특기자에 대한 부실한 학사관리 문제가 다른 대학에서도 공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 상황에서 이화여대 총장과 교수만 구속 재판하는 것이 옳으냐”고 항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전문가들은 체육특기자에 대한 부실한 학사관리 관행이 대학을 넘어 중고교에서도 일상화돼온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교육부가 청담고 사례를 출발점 삼아 전국 중고교 실태 조사에 나설 경우 체육특기자 제도가 가진 총체적 문제점이 확인될 것이라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체육계에 종사하는 이 전문가는 “김연아가 다닌 중고교에 그가 연습할 수 있는 스케이트장이 있었나. 박태환이 다닌 중고교에 그가 훈련할 만한 수영장이 있었나. 정유라뿐 아니라 상당수 개인종목 선수는 빠르면 초등학생, 늦으면 중고교생 때부터 개인코치를 두고 학교 밖에서 훈련하는 게 우리나라 관행이었다.

    수업을 아무리 빠져도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일약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여겨졌다. 그들에게 졸업장을 주는 것에 지금까지 뭐라 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나”라고 꼬집었다. 이 전문가는 또 “축구, 농구, 야구처럼 학교에서 합숙훈련을 하는 단체종목 학생선수는 수업에 빠질지언정 최소한 학교에는 나온다.

    그들을 훈련시키는 코치도 학교 직원이라 최소한의 관리가 된다. 그러나 개인종목 선수는 그동안 아예 관리 사각지대에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도 덧붙였다.

    또 다른 체대 교수는 서울시교육청이 청담고 감사에서 지적한 ‘허위 공결’ 문제와 관련해서도 “관행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에 따르면 개인종목에 출전하는 학생선수는 보통 대한빙상경기연맹, 대한수영연맹 같은 경기단체에서 수업에 빠지는 이유가 적힌 사유서를 받아 학교에 제출한다.

    그런데 경기단체들은 사유서를 대회 일정이나 훈련 스케줄에 딱 맞춰 써주지 않아왔다. 이 교수는 “중요한 대회가 있는 달 전체에 대해 결석 사유서를 써주기도 하고, 편의에 따라 몇 개월에 해당하는 사유서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게 없으면 지금까지 해외 전지훈련이나 집중훈련이 필요한 개인종목 선수들이 어떻게 운동을 해왔겠나. 그동안은 그렇게 훈련에 전념해야 큰 대회에서 상을 받고 좋은 대학도 간다고 여기는 게 일반적인 학교 현장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명문대가 학생선수의 학업 성적과 무관하게 대회 입상 실적을 기준으로 체육특기자를 선발한 것도 사실이다.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바탕으로 이화여대에 합격한 정씨처럼 수많은 스타플레이어가 고등학생 때 대회 실적을 근거 삼아 국내 명문대의 동문이 됐다.

    이 때문에 중고교 측도 개인종목 학생선수들이 출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열심히 훈련한 것으로 여겼을 뿐, 공결 처리한 날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을 했는지는 따지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태룡 한국스포츠개발원 책임연구원은 이에 대해 “1972년 체육특기자 제도를 만든 취지 자체가 ‘학생선수들이 수업에 신경 안 쓰고 운동에만 전념해도 상급학교에 갈 수 있게 해주겠다’ 아니었나”라면서 “이런 제도를 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공부도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공부하는 학생선수를 향한 꿈

    이른바 ‘정유라 사건’은 대학의 부실한 체육특기자 입학 및 학사관리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전국 93개 대학이 회원으로 있는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협의회)가 ‘학생선수 학사관리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고 직전 2학기 성적이 평균 C학점 미만인 학생은 협의회가 주최하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도록 하는 등 구체적인 변화도 시작됐다(42쪽 기사 참조).

    이용식 가톨릭관동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는 “일선 교수들도 ‘정유라 사건’ 이후 자체적으로 학사관리를 엄격히 하는 분위기다. 체육특기자 학생들이 1~2학년 때 교양수업 수강신청을 많이 하는데 이번 학기부터 담당교수들이 수업에 빠지는 걸 양해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강원 평창에서 주로 훈련하는 국가대표 선수 학생을 비롯한 교내 체육특기자들에게 “국가대표 선발전처럼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대회를 앞두고 공결을 쓸 수 있게 나머지 기간에는 되도록 수업을 다 들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교육부도 조만간 체육특기자의 선발 및 학사관리 전반에 대한 개선 방안을 마련해 발표할 방침이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이 없는 건 아니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한국 사회에서 운동이 더는 입신양명 수단이 아니다. 그렇다고 선진국처럼 자아실현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중고교에서 운동부에 가입하는 학생 중 상당수는 운동을 발판으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일부 비인기 종목은 그런 학생이 오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힘들다. 그런 종목의 선수 출신 지도자가 ‘이 운동을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며 학생들에게 운동부 가입을 권하고, 그렇게 일단 운동부에 발을 들인 학생들이 코치가 ‘대학에 보내줄 때까지’ 목숨 걸고 운동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원체육과 엘리트 스포츠가 굴러온 게 사실”이라며 “갑자기 이 틀을 바꾸려면 적잖은 이의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이상한’ 상황에 계속 머물 수만은 없다는 사실도 많은 이가 알고 있다. 박진경 한국스포츠사회학회 회장은 “교육부가 이미 각계 전문가가 낸 체육특기자 제도 개선안을 종합해 최종안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체육계의 반발이 없지는 않겠지만 교육당국도 ‘더는 이 상태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을 가진 만큼 머잖아 체육특기자의 학사관리를 정상화하는 근본적인 방안이 마련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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