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6

2009.10.13

“니, 부산영화 흥행 코드 아나?”

‘친구’이어 ‘해운대’ ‘애자’ 대박행진 … 신·구 공존, 공동체 향수를 느끼는 도시

  •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hawks1965@hanmail.net

    입력2009-10-01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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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X를 타고 부산에 가다 보면 대구를 지날 즈음부터 열차 안이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걸걸한 경상도 사투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이다.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정겨울 때도 있다. 사적인 전화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사적인 것을 공적인 영역에 풀어놓아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눈치다.

    택시를 타도 기사들이 서울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손님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이것 역시 부담스럽지만 서로 코드가 맞으면 즐거워지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지인의 소개로 부산 사람을 만나 거나해지면 금방 형님 동생 사이가 된다. 안면을 트면 부산 사람들은 금세 살가워진다. 초면에도 ‘우리가 남이가?’라고 묻는 것 같다.

    안면 트면 곧바로 “우리가 남이가”

    곽경택 감독의 출세작 ‘친구’에는 부산 사람들의 기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달조직의 중간 보스로 자리잡은 준석(유오성 분)은 도심의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세운다. 절친했던 고교 동창 상택(서태화 분)이 택시에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다짜고짜 상택이 탄 택시 앞에 자기 차를 세워 가로막고는 의아해하는 상택에게 달려가 외친다. “친구야!”라고. 느닷없이 멈춘 그의 차 때문에 순식간에 정체가 된 도로. 다른 차들이 아무리 클랙슨을 눌러도 준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우리는 친구 아이가?”라며 서로 우정을 확인하는 말이 이처럼 살갑게 다가오는 영화도 드물다.

    ‘해운대’에서 주인공 만식(설경구 분)은 해운대 미포의 조그만 어촌에 살면서 지역 토박이들이 그렇듯, 마을의 온갖 대소사를 참견하며 빈둥거린다. 만식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그가 연희(하지원 분)의 횟집 주변을 축으로 어슬렁거리면서 동네 친구,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로 시간을 죽이는 그 마을의 정서가 영화에 그처럼 깊숙이 각인되지 않았다면, 후반부에 닥쳐오는 그 공동체의 붕괴에 관객이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어촌 생활의 내용물엔 사실 별게 없다. 사소한 말다툼과 골칫거리를 안겨주는 일상적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뿐이다. 서로 친척 안부까지 묻는 순경들과 적당히 눙치며 사고를 무마하는 그렇고 그런 관계들이 일상적으로 나열된다. 이 공동체의 정서는 대도시에선 이미 사라져간 것이다.

    부산은 한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지만 예전의 빈민가와 해운대의 뉴타운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옛것과 새것이 기적적으로 공존하는 곳이다. 많은 영화사가 이 도시를 촬영지로 택하는 것은 영화도시로 브랜드 가치를 꾀하는 부산시의 정책 유인 덕도 있지만 실제로 로케이션하기에 매력적인 공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해운대’가 공간 배경으로 택한 미포만 해도 한가로운 어촌과 거대한 마천루를 형성한 아파트촌이 하나의 시선 축으로 수렴될 수 있는 특이한 공간 개성을 지녔다. ‘해운대’는 전통적인 공동체가 개발 압력으로 무너지느냐 마느냐 하는 드라마의 갈등을 거대한 쓰나미가 덮치는 것으로 무마한다. 태풍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재건에 나선다. 대중영화답게 언제 갈등과 고통이 있었느냐는 듯 상황은 해피엔딩으로 달려간다.

    1000만 관객이 보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감독에게 그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보는 사람 처지에선 좀더 생각해볼 거리가 남는다. 이웃집 숟가락 수까지 아는 마을 공동체 정서는 서서히 향수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해운대’는 악착같이 그 공동체 정서를 붙잡으며 그게 부산적인 것의 핵심이라고 은근히 강조하나, 현실에 어른거리는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는 것은 아니다. 해운대의 아파트 마천루를 쓰나미가 덮치는 이미지는 잠재적으로 이 공동체의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 우리가 사는 도시의 시간성조차 돈이 된다면 ‘개발’이라는 당위 아래 파괴하는 한국적 상황에 대해 뭔가 지워지지 않는 잔영을 남긴다.

    흥미롭게도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대체로 이런 향수와 불안의 변증법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택했다. ‘친구’는 무구한 남성 의리 공동체를 탐구한 작품이지만 ‘의리는 없다’는 것으로 끝난다. 서로 대결해야 하는 깡패조직에 들어간 준석과 동수는 결국에는 서로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고, 동수는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최후의 한마디를 남기고 죽어간다.

    활달한 사투리 정서적 공감대

    상처만 남은 상황에서 영화는 주인공들이 꼬마 시절 바다에서 놀면서 “조오련과 물개가 수영 시합을 하면 누가 이기느냐” 따위의 시시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걸 보여주며 끝난다. 그들 상호 간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을 때 외부와 담을 치고 그들끼리 놀았던 무구한 놀이 공동체는 그들이 어른이 되면서 깨진다. 그렇다면 향수밖엔 남는 게 없을 것이다. ‘해운대’도 앞서 말한 것처럼 전통적인 유대감을 품고 있는 어촌 마을과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개발관광지 해운대의 모습을 번갈아 비추면서 마을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최근 개봉한 ‘애자’는 아들만 위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서운한 딸이 늘 티격태격하며 정을 쌓는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결말은 역시 관계의 회복과 이별이 동시에 찾아온다는 쪽이다.

    의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의리가 상할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지만, 부산지역 특유의 활달하고 공격적인 어감의 사투리는 이런 불안감에 대응하는 ‘살아 있는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애자’에서 닭살 돋는 모녀간의 대화가 부산 사투리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공감을 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실은 앞서 거론한 영화들에서 진짜 주인공은 사건이 아니라, 사투리와 그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의 다소 격한 정서일지도 모른다.

    “부산 사람들은 화끈하다”고 말할 때, 그 화끈함이 행동으로 증명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말로 구현된다. ‘해운대’에서 만식이 연희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혼자 흐느끼며 “잘 지내셨지예?”라고 망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의 감정적 파동은 다른 지방 언어에서는 구현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어떠하든 간에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파고드는 부산 사투리의 정겨운 어감만큼 저항하기 힘든 것도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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