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1

2009.09.01

전술 바꾼 北, 대응 카드 고르는 南

北, ‘조문정치’ 통해 대화 공세 … 정부, 비핵화 요구 근본 변화 없어 고민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입력2009-08-26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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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 바꾼 北, 대응 카드 고르는 南

    2005년 8월 폐렴 증세로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한 바 있는 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이번 조문 명단에도 포함됐다.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조의를 표하고 조문단 파견을 알려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서거 하루 만인 19일 오전 조전(弔電)을 보내고 최고위급 조문단 파견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날인 20일 오전 3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장군님’의 지시에 따라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이 포함된 ‘특사 조문단’이 21일부터 이틀간 서울을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통민봉관’ 고도의 노림수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누가 봐도 북한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대남 ‘조문정치’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북한은 과거에도 남한의 주요 인사가 사망했을 때나 이후 치러진 추모행사에 조전과 조문단을 보내 고인을 애도하면서 자기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조문단이 남한에 체류하는 동안 김 위원장의 ‘담화’를 읽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한이 8월 중순부터 빠른 속도로 추진하고 있는 대남 화해 국면 조성을 앞당겨 향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와 비교하면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조전은 속도도 빨랐고 내용도 풍부했다.



    북한은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지 이틀째인 5월25일에야 조전을 보내왔다.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건조한 내용이었다. 반면 김 전 대통령 서거 하루 만에 온 이번 조전에서는 “그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남긴 공적은 민족과 함께 길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며 고인을 찬양했다.

    북측이 예고한 조문단의 ‘급’도 상당히 높은 수준. 김기남 비서는 노동당 내 최고위 서열이자 김 위원장의 대내 공개 활동을 가장 많이 수행해온 측근 중 측근이다. 그는 2005년 ‘8·15 민족대축전’ 당시 서울을 방문해 분단 이후 북측 인사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그리고 당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폐렴증세로 입원해 있던 김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북한이 조문단 파견을 통해 남북관계에 대한 자기 입장을 밝히고 남한 정부의 태도 변화를 압박할 것이라는 점은 일찍이 예상됐다. 고려대 북한학과 유호열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찬양하고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을 ‘우리 민족끼리’와 민족 화해협력의 정신에 따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를 압박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북한이 정부를 우회해 중국 베이징(北京)을 경유한 국제 팩스로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현 한겨레평화재단 이사장)에게 전보를 보내 조문단 파견을 통지한 것은 전형적인 ‘통민봉관’(通民封官·민간과는 대화하고 당국과는 대화하지 않는 것) 전술로, 남한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려는 고도의 노림수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술 바꾼 北, 대응 카드 고르는 南

    8월13일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 씨가 북한에 억류된 지 137일 만에 전격 석방됐다.

    국장(國葬) 기간 내내 남한사회는 북한의 ‘조문정치’로 술렁였다. 통일부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북한이 조전이나 조문단을 보낸 경우는 이번을 포함해 모두 8차례. 그중 조문단을 보낸 것은 4차례다. 그러나 이번 조문정치는 여러 면에서 아주 특별했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직급을 막론하고 북한 인사가 남한을 방문한 첫 사례였다. 이번 방문은 또 북한이 지난해 초부터 진행해온 대남 무차별 공세를 일단락 짓고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고 할 수 있다.

    협상 … 신중 … 관망 … 3가지 의견

    북한의 대남정책 국면 전환은 지난 4월부터 감지됐다. 북한은 4월 개성공단에서 남북 당국 간 접촉을 시작하면서 대남 공세의 수위를 낮춰왔다. 그러다 이종혁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8월4일 금강산에서 현정은 회장을 만나 억류자 석방을 위한 방북을 요청한 뒤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기 시작했다.

    현 회장은 8월10일 평양을 방문했고, 북한은 13일 조건 없이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 씨를 석방했다. 김 국방위원장은 16일 현 회장과의 오찬 회동 자리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 등 5개 항의 남북 교류협력 사업에 합의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남한 당국과의 대화 의지를 피력했다. 5개 항의 교류협력 사업은 △금강산관광 재개 및 비로봉 관광 시작 △군사분계선 육로 통행 등 원상회복 △개성관광 재개와 개성공단사업 활성화 △백두산관광 시작 △올 추석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개최 등이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태도 변화가 전략적이 아닌 전술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당국자들은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이 미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를 피해가기 위해 전술적으로 대남 화해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며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단 파견과 현대그룹과의 5개 항 합의 등을 통해 미국에 변화의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남남갈등을 유발하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미 양국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라는 국제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요구에 부응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때문에 당장 북한 당국과의 협상에 나서야 하는 정부의 속내는 다소 복잡한 듯하다. 북한 유화공세에 대한 대응 방안 측면에서 정부 당국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인 적극적 협상파는 북한을 일단 대화 테이블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남한의 주장을 펴고 설득해 향후 남북관계와 북한의 비핵화 등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부류인 신중파는 현 정부 지지층의 비판 여론을 감안하고 북한의 의도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보수적 스탠스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부류인 관망파는 그 중간에서 고민하며 상황의 진전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억류자 석방, 5개 항의 교류협력 사업 재개 합의, 고위급 조문단 파견 등 대남정책 변화에 급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북한은 남한 정부에 고민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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