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0

2009.08.25

당신의 여행가방에 들어 있는 것

  • 김민경 holden@donga.com

    입력2009-08-19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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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여행가방에 들어 있는 것

    가방을 눕히고 방바닥 가득 물건을 꺼내놓지 않아도 칫솔과 화장품의 행방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이렇게 체계적인 가방을 보면 욕심이 납니다. 리모와(RIMOWA)의 탱고. 아래는 버락 오바마가 들고 다닌대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투미(TUMI)의 가방입니다. 다양한 수납기능에 방탄 소재와 가죽으로 나왔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여름휴가만 같아라’가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었을 겁니다. 다들 휴가 잘 다녀오셨는지요. 휴가 가방에 어떤 물건들을 넣어가고, 무엇을 비우고 또 무엇으로 채워오셨나요? 여행가방은 성격 나쁜 항공사 직원이 집어던져도 보란 듯 말짱한 하드케이스였나요, 아니면 방랑자처럼 주름진 보스턴 가방이었나요? 커다란 배낭과 빨간 아이스박스였을 수도 있겠네요.

    전 이제야 슬슬 짐을 싼답니다. 다 먹어버린 팥빙수 그릇처럼 텅 빈 도시의 시원섭섭한 맛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이젠 무슨 낙으로 사냐’며 저를 시기하는 시선도 은근히 즐기면서요. 인간은 여행가방을 싸는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모든 여행지 상황을 ‘시뮬레이션’한 뒤 입을 것, 놀 것, 먹을 것, 바를 것을 몽땅 가방에 넣는 스타일이죠.

    예를 들면 바닷가에서 입을 옷 상의와 하의, 신발, 모자, 액세서리를 매치해서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어 넣고, 좀 좋은 식당에 갈 때를 대비한 정장을 또 한 세트로 만들어 넣습니다. 그렇다면 헤어드라이어도 포함해야 할 테고요. 등산하기 좋은 산이 있을지 모르니 등산복도 한 벌. 추울 때, 더울 때, 쾌적할 때, 이 모든 것이 비상한 상황이 됩니다.

    또 모기약, 소화제는 물론 사고에 대비해 1회용 밴드, 진통제, 변비약도 마련하고 숙면을 위한 수면안대도 돌돌 말아넣습니다.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이고, 여행 중 거칠어진 피부를 위해 보습팩도 숙박 일수대로 넣습니다. 입맛에 안 맞는 식당을 만날까봐 컵라면, 김, 고추장, 볶은 김치, 커피믹스도 사고 조난 시에 대비해 초콜릿바도 삽니다.

    요즘은 mp3, 닌텐도, e북 등 각종 오락용 전자디바이스를 넣어야 여행 좀 다녀본 사람 취급을 받아요. 말발굽 모양의 목베개와 담요, 기내용 슬리퍼를 갖고 다니는 사람들에게서는 여행의 포스가 뿜어나오죠. 이 정도면, 그냥 ‘이민’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됩니다. 만약 비행기로 여행한다면 그의 모든 왕국을 100ml 이하 사이즈로 줄여 집어넣은 투명한 비닐백도 필요하답니다.



    반면 모든 종류의 여행에 티셔츠 3개와 속옷 3개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여행지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현장에서 상당한 해결 능력을 보입니다. ‘견디는’ 능력이죠. 대신 남들처럼 멋진 여행사진은 얻기 힘들어요. 어쩐지 근근이 살아가는 현지인처럼 보인다니까요.

    이 두 유형의 인간이 함께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관계가 지속되려면 특별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여행 후 ‘뒷담화’로 깨진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잖아요?

    “그 거대한 짐 때문에 볼 것도 제대로 못 봤어. 밤마다 얼굴에 달걀귀신처럼 팩을 붙이고 자는 바람에 내가 가위에 다 눌렸다고!”

    “여행은 노숙의 체험이 아니야. 정말 불편하고 당황스럽더라.”

    ‘가방이 가벼울수록 여행의 자유가 커진다’는 신념이 굳건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완벽한 짐싸기가 여행의 즐거움을 보장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성의 핸드백을 ‘자궁’에 비유하는 사회학자의 주장에는 ‘프로이트 광신도’라고 반발하면서도, 여행가방이 삶에 대한 마음의 자세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행가방에 들어 있는 것들을 보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구김 없이 슈트를 수납할 수 있는 공간과 노트북, 귀중품과 화장품 등을 각각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스마트하게 구획된 여행가방에 요즘 더 끌리는 건, 제가 체계적이지 못하고 계획이 결핍된 인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이 냉철한 가방을 보고 좀 배우라고 스스로를 꾸짖기도 하죠. 똑똑한 가방은 짐이 아니라 완벽한 여행의 동반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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