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2

2009.06.30

“어진 임금을 만나러 왔소, 댁은 뉘신데…”

경상도 촌부 김희동, 해삼 망태 들고 성종 만나러 무작정 상경기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6-25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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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진 임금을 만나러 왔소, 댁은 뉘신데…”

    대한제국 민속화에 나타난 광통교의 모습. 성종은 이 다리 아래에서 노숙하는 김희동을 만나 그의 순수함에 감복, 벼슬을 내렸다.

    조선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영특하고 국량(局量)이 넓을 뿐 아니라 미복잠행(微服潛行)으로도 유명한 군주였다. 밤이면 편복으로 갈아입고 어두운 한양 장안을 돌아다녔다. 중신들은 만류했으나 성종은 듣지 않았다.

    ‘백성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내 눈으로 친히 보아야 믿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국왕의 명분이었다. 금지옥엽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중신들은 근심했으나 국왕은 한두 명의 무예별감(武藝別監)만 데리고 단신 보행했다. 그나마 근시(近侍)도 못하게 하고 멀찌감치 뒤따르게 했다.

    어느 날 밤 성종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로 나섰다. 광통교 위를 지나는데 다리 아래에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나이는 마흔 남짓 돼 보이는데 행색이 남루한 것이 시골 사람이 틀림없었다.

    성종이 가까이 가서 누구냐고 부드럽게 묻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저는 경상도 흥해(興海) 땅에 사는 김희동(金喜東)이라는 숯장수인데, 마흔이 넘도록 어진 임금님이 계신다는 한양 구경을 못했지요. 그래서 서울 구경도 하고 임금님도 뵈려고 벼르고 별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하룻밤 잘 만한 탄막(炭幕)을 찾아 헤매다 보니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뉘신데 밤이 깊은 서울을 이렇게 나다니시오. 보아하니 선비 같은데…”라고 했다.

    성종은 속으로 웃으며 사실 어질고 착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를 찾아온 시골 백성이라 생각하고, 그의 소박함과 순진함에 감동했다. 성종은 시치미를 뚝 떼고 “나는 동관에 사는 이 첨지라는 사람이오. 임금이 있는 곳을 알기는 하오만, 만일 알려주면 임금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 하오?”라고 물었다.



    촌부의 순수함에 감동한 왕

    그러자 김희동은 서슴지 않고 “참말이지, 우리 고을에선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우리 임금님을 칭찬하오. 임금님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걱정 없이 잘 산다는 거지요. 내가 서울에 와서 그냥 돌아가기도 뭣해 임금님이나 한번 뵈옵고 돌아갈까 하오. 빈손으로 뵙긴 뭣할 것 같아 우리 고을 명산인 전복과 해삼 말린 것을 좀 가지고 왔지요. 임금님께 이것을 드려 수라 반찬이나 합시사 하고. 보아하니 서울 양반으로 거짓은 없을 듯한데 어디 임금님을 좀 뵙게 해주시구려”라고 간청했다.

    그때 멀리서 무예별감들이 달려왔다. 성종은 그들에게 귀띔하고는 “이 사람들을 따라가면 임금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터이니 안심하고 가시오”라고 했다. 김희동은 한양의 인심이 좋지 않다는 말만 들었는데 참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났다 생각하고, 별감을 따라 그의 집에 가서 묵었다. 별감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여관집 주인처럼 대접했다. 이튿날 성종은 편복 차림으로 별감의 집에 들렀다. 그러자 희동은 몹시 반가워하며 “이렇게 시골 사람을 후대하시니 이 첨지의 은혜가 큽니다.

    “어진 임금을 만나러 왔소, 댁은 뉘신데…”

    드라마 ‘왕과 나’의 성종(고주원 분).

    어떻게 우리 어질고 착하신 임금님을 만나게 해줄 수 없소?”라고 다시 부탁했다. 옆의 별감들은 희동의 언행을 타박하려 했으나 성종이 눈짓으로 말리고는 “당신의 지성은 돈독하오만 벼슬이 없는 사람은 임금을 대할 수 없게 돼 있소. 내가 뵐 수 있도록 주선해볼 테니, 그렇게 꼭 임금을 뵈려 한다면 무슨 벼슬 하나를 청해보시오. 내가 힘써서 되도록 해보겠소”라고 했다.

    김희동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벼슬을 말하라니 난처했으나 “우리 마을에 충의(忠義) 벼슬하는 박충의라는 굉장한 양반이 있지요. 댁이 무슨 수로 내게 그런 벼슬을 시켜주겠소. 다 헛말 같소. 이왕 온 길이니 임금님께 길이 닿으면 이것이나 전해주시지요” 하고는 해삼, 전복 망태를 꺼냈다.

    성종은 웃음보가 터지는 것을 겨우 참으며 “내가 힘써볼 테니 하룻밤만 더 묵고 계시오. 혹시 벼슬이 되면 당신이 직접 갖다 바쳐도 좋지 않겠소” 하고는 입궐(入闕) 후 이조판서에게 명해 그를 충의초사(忠義初仕)로 임명했다. 희동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서울 선비의 친절 때문에 그 벼슬자리를 기다려보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정말 그 집 주인이 사모와 관복, 나막신을 가져다주며 빨리 궁으로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라고 했다. 갑자기 충의초사가 된 희동은 그를 따라 궁궐로 갔다. 희동은 전도관(前導官)이 시키는 대로 임금께 세 번 절하고 부복하자, 그때 용상에서 “내가 임금이다. 네가 짐을 보러 수백리 길을 왔다지. 겁내지 말고 쳐다보아라”라는 윤음(綸音)이 들렸다.

    희동이 머리를 겨우 들고 용틀임하는 붉은 용상에 높이 앉은 임금을 쳐다보니 바로 이틀이나 마주앉아 대하던 이 첨지가 아닌가. 그래서 희동은 “이 첨지가 어떻게 여기 와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모든 신하의 매서운 눈초리가 법도를 모르는 희동에게 쏠렸다.

    그제야 희동은 이 첨지가 바로 임금임을 깨달았다. 그는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벌벌 떨었다. 영문을 모르는 승사 각원들은 엄형을 주장했으나 성종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만좌가 모두 화락했고, 희동은 당황한 나머지 가지고 온 해삼과 전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MB는 ‘근원적 처방’으로 혼란에 마침표 찍어야

    그때 성종은 자비가 가득한 눈으로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그것을 주우라고 말한 뒤 “해삼과 전복은 희동이 나를 위해 먼 길을 걸어 갖고 온 것이니 수라간에 보내 내 한 끼 반찬으로 하여라”고 어명을 내렸다. 신하들은 국왕의 처사에 감읍했고, 성종은 희동에게 후한 상금을 하사했다. 그 후 희동은 충의벼슬로 역마를 타고 금의환향했다. 참으로 국왕과 백성이 하나로 소통하는 아름답고 가슴 훈훈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흐른 대한민국 2009년 6월. 분명 1987년 6월이 아닐진대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가는 듯 혼미한 정국이 재현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국민 정서와는 달리 ‘조문 정국’의 후유증이 이상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유권자 절반의 지지로 청와대에 입성한 현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는 전직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고, 민주주의 시대에 살면서 민주주의의 퇴조를 비판하는 대학교수를 비롯한 시민·종교단체의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거기에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도 모자라 현 정부를 괴뢰당국이라 위협하고 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이명박 정부를 옥죄는 형국이다.

    이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오만과 편견의 편 가르기를 종식하고 국민과 격의 없는 소통의 정치철학을 펼쳐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제시해야 한다. 조선 봉건왕조에서도 성종과 김희동이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뛰어넘어 진솔한 소통으로 민본적 왕도정치를 구현하지 않았는가.

    조속한 경제회복과 사회안정을 갈구하는 다수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지난해 촛불사태와 같은 무대응 대처가 아닌 정공법으로 나서야 한다. 국민 대다수는 이명박 정부에 애정과 기대를 갖고 있는데 대통령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희대의 도적인 도척(盜)의 개가 만고의 성군(聖君)인 요(堯)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은 되도록 빨리 6월15일 라디오 연설에서 밝힌 ‘근원적인 처방’을 구체화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해 혼란에 마침표를 찍길 바란다. 그래서 2009년을 이성과 상식이 지배하는 성숙사회의 원년(元年)으로 삼았으면 한다. 7월30일 우주강국으로 첫발을 내디디는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의 발사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국민축제의 기념비적인 날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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