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5

2009.05.12

살얼음판 위로 미끄러지는 일처일부제

페트리 코트위카 감독의 ‘블랙 아이스’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9-05-08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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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얼음판 위로 미끄러지는 일처일부제

    사라(왼쪽)와 툴리는 한 남자를 각각 남편과 남자친구로 둔 채 서로에게 기이한 감정을 느낀다.

    어떤 남자는 아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영화 ‘블랙 아이스’(감독 페트리 코트위카)의 주인공 레오는 아내의 생일날 아내 사라에게 “기타 통 속의 콘돔 2개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콘돔을 풍선처럼 불며 노려보는 아내 앞에서 그는 거짓말을 한다. “건축 모형을 감싸는 데 콘돔을 보호막처럼 썼다”고.

    20대 후반의 여성 툴리는 남자친구인 유부남 레오의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그녀는 망원경까지 준비해 사랑하는 남자의 집을 염탐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본 것은 아름답고 성깔 있어 보이는 아내에게 뺨을 맞는 레오의 모습.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이제 남자는 자신의 것이라 여긴다.

    ‘블랙 아이스’는 도로 위에 얇게 얼어서 그 존재를 알기 어려운 살얼음판을 말한다. 차나 사람은 오히려 이 살얼음판에 미끄러져 다치기 쉽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얼음판이 있다’로 요약되는 이 영화의 주제는 불륜과 치정의 통속극보다 오해와 속임수의 비극에 무게중심을 둔다.

    영화 속에서 레오와 사라, 사라와 툴리, 툴리와 레오는 서로 질투하고 오해하고 반목하고 연대한다. 툴리가 레오의 아내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레오의 여동생이고, 사라는 이름을 크리스타 에릭슨(크리스타는 얼음 결정이 연상되고, 에릭슨은 핀란드에서는 김씨나 이씨 정도의 흔한 성)으로 바꾼 뒤 툴리에게 접근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국 드라마 ‘아내의 유혹’보다 셰익스피어 비극 ‘오셀로’에 가까워 보이고, 당신이 이 얼음판에 미끄러지고 마음을 베이는 것도 시간문제다.

    사라는 오해한다. 툴리가 젊고 아름다워서 레오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툴리가 자기 남자친구의 나체화라고 보여준 그림 속의 남편은 작고 여위고 성기도 작은데도, 사라는 남편의 열등감과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툴리는 오해한다. 자신의 태권도 도장에 나온 사라가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고. 차를 태워주고 술을 같이 마시고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남자친구가 유부남이란 비밀까지 나눌 수 있다고. 자전거는 툴리의 세계, 자동차는 사라의 세계다. 자동차를 태워주기 전, 사라는 툴리의 자전거를 뒷골목에 버린다.

    레오는 오해한다. 사라의 새 애인은 젊고 잘생긴 놈일 것이라고. 레오가 “그놈이 뭐가 특별해?”라고 묻자 사라는 울면서 “그와는 함께 웃고 울 수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이 영화에는 정부와 애인 사이인 레오와 툴리의 정사 신이 한 장면도 없다. 오히려 영화 시작 부분에 단도직입적으로 등장하는 뜨거운 정사는 부부인 레오와 사라의 것. 그런데도 사라가 바란 것은 누군가와 함께 울고 웃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사라와 툴리가 연적이자 동지로, 심지어 기이한 연대나 관능의 감정마저 나눈다는 것이다. 결국 세 명의 불우한 인간들은 가면을 쓴 채 자신들이 처음 만났고, 최후의 만찬이기도 한 파티에서 비극을 상연하게 된다. 숨겨진 살얼음과 가면, 관음증과 치정은 정말 어울리는 짝이 아닌가.

    신인 감독 페트리 코트위카는 냉랭한 북구의 설원을 바탕으로 흰색과 검은색, 빛과 어둠의 파노라마에 갇힌 인간의 내면을 정교하게 형상화했다. 그 차가운 외면에 갇힌 뜨거움이 느껴진다면, 사실 일처일부제라는 강력한 기호에 미끄러진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두 여자의 심리적 격투와 감정적 연대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기꺼이 미끄러져보라. 영화의 마지막은 시커먼 입을 벌린 낭떠러지가 아니라, 그 어둠이 감추고 있는 또 다른 구원의 여린 빛깔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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