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4

2009.05.05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볍씨가 부르는 사랑 노래

  • 김광화 flowingsky@naver.com

    입력2009-04-29 16: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볍씨가 부르는 사랑 노래

    못자리에 볍씨 뿌리기. 기쁜 마음으로 한다.

    첫 농사를 지을 때 내가 몸담고 있는 정농회 선배들에게서 인상 깊게 배운 것이 있다. 초상집에 다녀온 뒤에는 씨앗을 뿌리지 않으며, 씨앗을 뿌릴 때는 부부싸움조차 하지 않는단다. 슬프거나 화난 마음이 씨앗에 좋을 리 없다는 것. 그렇다고 당장 이를 내 삶 속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게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했고, 세월이 흘러야 했다. 우선 씨앗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씨앗은 볍씨. 이 씨를 뿌릴 때만이라도 선배들을 따라 해보자.

    돈보다 생명이 중심인 삶을 위해

    볍씨를 못자리에 뿌리자면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볍씨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잡균을 없애는 소독 과정. 독한 화학약품으로 소독하면 볍씨에도 좋을 리 없고, 소독이 끝난 물을 함부로 버리면 오염되니 뒤처리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우리는 60℃를 조금 웃도는 물에 볍씨를 10분 정도 담가 ‘열탕소독’을 한다. 그 다음이 찬물에 담그기. 망에 담은 볍씨를 흐르는 물에 넣고 하루 두세 번 건져냈다가 다시 담그기를 반복한다. 물 온도에 따라 다르지만 열흘 남짓 그렇게 하다 보면 씨눈 자리가 팽팽하게 부푼다.

    그러다 하나둘 하얀 싹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보는 순간, 선배들이 해준 말이 새삼스레 실감난다. 노란 껍질을 뚫고 나오는 저 여리고도 여린 새싹. 잘 자라 우리 밥이 되고, 목숨이 되는 생명이여! 이때부터는 행여나 다칠세라 조심조심 다루고,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갖지 않으려 애쓴다. 설사 사람 관계에서 그런 감정을 받았더라도 싹이 트는 볍씨를 만지노라면 씨앗한테서 슬그머니 위로를 받는다. 괜찮다고, 힘내라고, 잘될 거라고.

    볍씨에 싹이 돋기 시작하면 하루쯤 더 골고루 싹을 틔운다. 물에서 건져낸 볍씨를 5cm 정도로 얇게 편 다음 25~30℃의 따뜻한 곳에 둔다. 싹이 나면서 열도 나고 또 표면이 건조하니까 가끔 물을 뿌려준다. 그러는 사이 나만의 의식을 거행한다. 집 안에는 불을 넉넉히 지펴 온기를 돋운다. 목욕재개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못자리하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마당을 쓸고 집 둘레를 정리하면서 경건한 마음을 새긴다. 못자리에 볍씨를 뿌릴 때면 보통 때는 안 하는 기도를 다 한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볍씨가 부르는 사랑 노래

    집 앞에 복숭아꽃이 만발했다. 자신을 살리는 만큼 세상을 살린다(왼쪽).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 새롭게 자손을 퍼뜨린다(오른쪽).

    ‘볍씨야, 잘 자라다오.’

    이렇게 해서 농사가 얼마나 더 잘되는지는 솔직히 모른다. 그러리라 미뤄 짐작할 뿐. 다만 확실한 소득은 나 자신이 더 좋아지고, 부부 사이도 좋아진다는 점이다. 씨앗이 싹트는 충만감으로 자존감도 돌아보고, 부부 사이 소통하는 법도 새로이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살려가야 하지 않겠나. 볍씨만이 아니라 다른 씨앗을 만질 때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또한 씨앗이 싹트는 순간만이 아니라 곡식이 자라고 꽃 피고, 열매 맺는 모든 과정에서 부부 사이가 좋다면 얼마나 좋겠나. 농사를 계획하는 단계, 나아가 삶의 모든 순간마다 그럴 수 있다면?

    올해도 농사 계획을 부부가 함께 짜고, 그 결과를 아내가 그림으로 그렸다. 어디에 무얼 심을지, 지난해 그림을 참고로 올해 계획을 짜보는 거다. 그림에서 보듯 우리 식구는 먹을거리를 골고루 심는다. 쌀만 해도 멥쌀, 찹쌀, 검은 쌀. 밭에 심는 건 콩만 해도 10가지가 넘고 잡곡과 양념거리인 고추, 마늘, 생강 그리고 채소만도 수십 가지다. 과일나무 역시 몇 가지를 빼고는 손수 가꾼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가꿔야 1년을 먹고살 수 있다니…. 게으르거나 몸이 아프면 먹을거리는 놔두고 씨앗조차 건지기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을 돌보고 가꾸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가.

    그럼 내 생명은 어떻게 가꿔야 할까? 돈보다 생명이 중심이 되는 삶. 자신을 살리고 가꾸는 일이 모든 일의 바탕이 아닌가. 이걸 나는 ‘자기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무한경쟁에 억지로 자신을 맞춰가야 하는 자기 계발은 성취동기가 강하지 않으면 또 다른 억압이 되기 쉽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꾸준히 잘하기가 어렵다. 그 과정에서 잘 안 되면 겪지 않아도 될 실패를 맛보고, 덩달아 자존감도 멀어진다. 보통사람들이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살려야 세상이 산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볍씨가 부르는 사랑 노래

    <b>1</b> 싹이 트는 볍씨. 여리디여린 새싹이라 이를 만질 때면 부부싸움도 조심스럽다. <b>2</b> 땅에 묻어둔 야콘 관아에서 싹이 돋는 모습. 삶의 위로와 힘을 얻는다. <b>3</b> 올 한 해 우리 집 농사 계획도.

    반면 자기 사랑은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존감이 바탕이 된다. 이는 생명 본성에 가깝다고나 할까. 곁에서 누군가 부추겨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기에 스스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마음. 사람은 누구나 남이 뭐라 하기 전에 자신을 더 발전시키고 싶다. 더 잘 살고 싶고, 잠재력을 더 살리고 싶으며, 미지의 세계를 조심스레 탐색하는 마음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는가. 이를 잘 살려갈 때 일을 할수록 자신과 일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점차 하나 되는 과정이 되리라.

    농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글쓰기도, 사진 찍기도 그렇다. 글을 쓰다 보면 삶이 정리되고, 대상에 다가가 사진을 찍다 보면 무심히 지나갔던 모습을 새로이 본다. 나를 살리는 일이라면 그건 또 누군가에도 영감을 주지 않을까. 자신을 살리는 만큼 가족이 살고, 세상이 산다. 자신을 먼저 살리고, 남는 걸 세상과 나누는 이 삶이 나는 좋다. 싹이 트는 볍씨가 내게 말없이 메시지를 들려준다. 자신을 더 사랑하라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