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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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추억 만드는 ‘꽃들의 수다’

봄꽃 여행 2

  • 채지형 여행작가 www.traveldesigner.co.kr

    입력2009-03-27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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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 추억 만드는 ‘꽃들의 수다’

    경주 안압지

    “벚꽃이 눈송이처럼 하늘을 뒤덮는 4월이 되면 우리 딸이 오겠지. 얼른 벚꽃이 피기를 엄마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360일간 지구 곳곳을 떠돌다가 마지막에 도착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곳에서 받은 e메일에는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 때문일까. 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 벚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그리움이 왈칵 솟아오른다.

    내게 벚꽃의 기억이 그리움인 것처럼, 누구나 벚꽃에 대한 자기만의 추억을 한 가지쯤은 품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팔짱을 끼고 여의도 윤중로를 걷던 기억,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진해로 벚꽃놀이를 갔던 추억, 흩날리는 벚꽃 아래 솜사탕을 먹으며 부모님과 함께 봄 소풍을 갔던 유년시절. 벚꽃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힘들고 벅찬 일상도 아련해지는 것은 하늘을 뒤덮는 꽃구름이 됐다가 함박눈처럼 한꺼번에 떨어지는 벚꽃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벚꽃에 싸인 천년고도, 경주

    진해에 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던 경주 벚꽃. 누군가 올해 어디로 꽃놀이를 떠날 테냐고 내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경주에 가겠다고 답할 것이다. 경주 보문호를 수놓는 연분홍빛 벚꽃과 밤에 만나는 장군로의 황홀한 벚꽃 터널은 어느 곳의 벚꽃보다도 황홀함을 안겨준다. 덧없는 인생처럼 한순간에 스러지는 벚꽃과 천년의 세월을 흘러온 고도(古都) 경주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경주에서 벚꽃을 보기 위해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보문호. 수령 30년 이상의 벚나무 3만여 그루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보문호 주변에는 10km 길이의 벚꽃 산책로가 있는데,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꽃길 아래를 달려보는 것도 잊지 못할 봄을 만드는 방법이다.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쉽게 자전거를 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 도로도 잘 이어져 안전하다.

    다음에는 불국사에 가볼 차례. 빼곡히 늘어선 왕벚꽃 그늘을 따라가면 불국사가 나온다. 불국사를 감싼 왕벚꽃은 우리나라 종으로, 보통 벚꽃보다 잎이 큰 편. 경주에 왔다면 남산도 빠뜨려선 안 된다. 문화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경주 남산이 봄이 되면 화려한 꽃대궐로 변신한다. 숲 속 구석구석에 핀 진달래와 함께 숲을 덮고 있는 벚꽃도 상춘객의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한다. 특히 불상과 마애석불을 볼 수 있는 삼릉골 주변의 벚꽃 터널은 남산에 갔다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연분홍 추억 만드는 ‘꽃들의 수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벚꽃과 함께 봄을 맞는다.

    벚꽃 물결 가지마다 ‘낭만’, 진해

    ‘벚꽃’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이 바로 진해다. 작은 항구도시 진해는 1년 내내 조용하다가 4월만 되면 떠들썩해진다. 국내 최대 벚꽃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도시 곳곳이 벚꽃으로 뒤덮이고 전국에서 상춘객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진해 시가지의 벚나무는 34만4000여 그루에 이를 정도. 진해 어딜 가나 벚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진해에서 벚꽃이 가장 멋진 곳으로는 제황산 공원과 해군사관학교의 벚꽃길, 장복터널에서 여좌동까지 이어지는 국도변이 꼽힌다. 이 중에서도 해군사관학교의 벚꽃은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장관을 만들어낸다. 벚나무들도 수령이 50~60년이나 돼 웅장함까지 느껴진다.

    올해로 제47회를 맞는 진해 군항제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벚꽃 축제다. 1952년 이순신 장군 동상을 북원 로터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1963년부터 충무공의 얼을 추모하고 아름다운 벚꽃을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발전했다. 올해는 벚꽃 개화 시기가 예년보다 4~9일 빨라져 3월27일부터 4월5일까지 축제가 펼쳐진다. 공원이나 산에서 화려함을 뽐내는 벚꽃이 진해시내 곳곳으로 들어오면서 들꽃의 생기와 발랄함을 더한다. 길거리의 노점상도, 썰렁한 술집 간판도 벚꽃이 병풍처럼 펼쳐지니 모두가 한 움큼의 낭만을 간직한 장소로 달라진다.

    “내가 이 맛에 이곳을 못 떠나제. 이렇게 이쁜 데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라고?”

    진해에서 만난 슈퍼마켓 아주머니의 독백은 진해 벚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큰 힘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연인이라면 꼭 한 번쯤…십리 벚꽃길, 하동

    진해만큼이나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 경남 하동의 ‘십리 벚꽃길’이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초입까지 10리에 걸쳐 벚꽃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약 6km가 이어지는 하얀 십리 벚꽃길을 걸어봐야 한다. ‘혼례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을 연인들이 두 손을 잡고 끝까지 걸으면 백년해로한다는 말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벚꽃이 있을 때라면 언제 가도 행복한 곳이 이 길이다. 벚꽃이 만개할 때면 벚꽃 터널이, 바람에 맞아 벚꽃이 다 떨어지고 나면 꽃길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세상이 되니 말이다.

    드라이브 길도 그림이다. 하동포구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에 이르는 100리 길은 모두 벚꽃 지붕이 촘촘하게 이어진 터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봄이 되면 19번 국도를 기억해야 한다.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 어디 이곳뿐일까. 1300여 그루의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전북 남원의 요천 뚝방길, 팝콘처럼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벚꽃이 늘어선 순천 송광사, 월출산을 배경으로 꽃비가 흩날리는 전남 영암, 벚꽃으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지는 충주호까지 그야말로 전국의 4월은 벚꽃 세상이다.

    가까워서 더 좋은 수도권 벚꽃길

    진해도 경주도 멀어서 힘들다고? 벚꽃이 사랑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가까이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멀리 가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대신, 서울과 수도권 주변에서 펼쳐질 벚꽃의 향연에 눈을 돌려보자.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 윤중로에는 30~35년 된 왕벚나무 1400여 그루가 1.7km의 벚꽃길을 이루는 데다, 야간 조명이 있어 벚꽃놀이의 백미라고 하는 밤벚꽃 놀이도 즐길 수 있다. 올해 열리는 한강 여의도 봄꽃 축제는 4월4일부터 19일까지 펼쳐진다. 색다른 곳을 찾고 싶다면 아차산 옆 워커힐 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서울의 봄꽃길’로도 선정된 이 길은 4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벚꽃으로 뒤덮여 더없이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한다.

    벚꽃 명소에 사람들이 많다고 지레 포기하진 말자. 봄꽃을 보는 데 유념해야 할 것은 ‘시기’다. 바쁘다고 벚꽃놀이를 미루다가는 바닥에 떨어진 하얀 눈송이 같은 벚꽃만 아쉽게 내려다보게 될지도 모른다. 콧대 높은 봄꽃들은 당신만을 기다려주진 않을 테니, 올해는 마음 한쪽을 열어놓고 그리움 따라 꽃비 찾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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