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9

2009.03.31

‘애완견’이 되고픈 존재의 가벼움

‘탈모인’ 심리학자가 분석한 탈모의 심리학 … 인정 강박의식이 공포 주범

  •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swhang@yonsei.ac.kr

    입력2009-03-27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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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완견’이 되고픈 존재의 가벼움
    “펫(pet)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언니’들이 예뻐해줄 애인을 찾는다는 인터넷 광고 문구다. 구인광고를 통해 연하, 연상의 남자 애인을 찾는 세태는 이성간의 위계관계나 힘의 역학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의 또 다른 표식이 한 올 한 올 빠지는 머리카락으로 인한 대머리의 애사(哀史)다. 사실 대머리와 탈모는 유전이요, 자연스러운 삶의 기록이자 연륜의 표식이다. 경로사상이 실종되고 나이 듦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닐 때 연륜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사라진다.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아니, 탈모와 대머리가 마치 ‘털 빠진 개’처럼 변하는 상황이 된다. 빠지는 자기 머리카락을 보는 동시에 빨라지는 심장박동도 느껴야 하는 심리학자(필자도 탈모인이다)는 탈모와 대머리를 보는 우리의 심리를 통해 삶에 대한 인식을 재정비해보기로 했다.

    흔히 사람들은 “돈이 없어 억울하고 서럽다”고 말한다. 이 문제야 나 혼자만 겪는 게 아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변명도 할 수 없고 핑계 대기도 마땅찮은 일이 있다.‘못생긴 것, 뚱뚱한 것은 용서해도 대머리는 용서할 수 없다’는 세태가 바로 그것. 외모지상주의, 연륜에 대한 무시라고 허공에 대고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들이 연륜을 알아? 젊다고 까불지 마라’고 한마디 날리면 마음이 편해질까. 허공에 사라진 소리만큼 허탈함만 느낄 뿐이다.

    빠지는 머리카락은 자아와 자신감의 상실



    젊고 아름다워 보이기 위한 지방흡입과 보톡스 시술, 성형수술을 자기계발 노력처럼 받아들이는 세상. 이런 마당에 대머리로 지낸다는 것은 변신을 위한 노력의 결여다. 아니, 자기관리에 실패한 낙오자처럼 치부된다. 이런 현실이 인간을 외적 특성으로만 판단하는 우리 사회의 가벼움, 통속성 탓이라고 하면 다 이해될 수 있을까.

    탈모와 대머리의 숙명을 가진 사람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수준이 아니다. 젊은 탈모 환자는 취직은커녕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에서도 퇴출 1순위다. 간신히 취직해도 신입사원 처지에 바로 ‘김 부장’ ‘박 부장’ 소리를 듣는다. 특별 승진이면 좋으련만 속뜻은 ‘변변찮은 사원’이라는 것. 잘못한 일도 없는데 기피인물이 된다. 생각해주는 척 던지는 주위의 관심과 염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빙자한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다. 대머리는 전염병 환자, 때론 장애인으로 취급된다. 촌스럽고 게으른 사람. 안됐다는 눈길로 짠하게 보는 그들의 시선은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이렇듯 대머리에 대한 실체 없는 혐오, 탈모에 대한 두려움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대머리와 탈모를 혐오하거나 지나치게 신경 쓰는 문제는 사실 대머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방식,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정해진 규범이나 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고 믿을 때 탈모와 대머리에 대한 두려움, 혐오의 심리가 일어난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누군가의 펫이 되게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애완견의 심리다.

    ‘누구누구의 펫’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그리 낯설지 않다. 늘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심리, 바로 그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주위의 인정이 중요하다. 이때 가장 큰 고민은 ‘어떤 것이 나에게 옳은 선택일까’다. 여기까지는 건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잘 길들여진 방식의 삶이기도 하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외적 변화에서 자기 확신, 인정, 혐오, 비하의 감정을 느낀다. 대머리와 탈모는 가장 기피하는 외적 변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인생은 잘 길들여진 개처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대로 털 빠진 강아지가 돼서는 안 된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기보다 애완견을 기르기 시작했다. 대머리, 탈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뀐 것은 바로 애완견에 대한 열풍과 일치한다. 애완견의 털이 빠지면 괜찮은 주인은 병원에 데려간다. 불성실한 주인은 그 개를 버린다. 또 다른 ‘개 같은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털 빠진 개에 대한 거부감, 자신의 털이 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주인에게 버려진 유기견의 심리는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늘 주위 사람이나 상사가 자기를 어떻게 봐주는지를 살핀다. 속으로는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왕따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왜 자신의 기분이 늘 우울할까를 걱정한다. 왜 자신에게는 안 되는 일이 많은지 투덜거린다. 억울해하기도 한다. 어찌할 수 없이 조직이나 환경 속에서 스스로 ‘찌그러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살아가면서 부모나 상사 또는 주위의 인정을 요구하며, 자아(셀프)가 무엇으로 표현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 빠지는 머리카락은 바로 사라지는 자신감과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

    애완견 아닌 야생 늑대가 활보할 그날을 기다리며

    애완견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유기견의 심리가 될 때 탈모와 대머리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털이 인생을 결정하는 핵심 지표가 되는 것이다. 털에 의미를 두고 털에 고민하는 삶은 어디엔가 자신을 맞춰야 하고, 스스로 삶의 통제권을 가질 수 없는 학습된 무력감을 경험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대머리와 탈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애완견처럼, 유기견처럼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확실한 삶의 기준을 외적 표식에서 찾는 사람들의 ‘자기 생성적 불안(self producing fear)’인 것이다.

    ‘애완견’이 되고픈 존재의 가벼움
    탈모와 대머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발작적 반응’은 그것을 사회적 관계의 어려움, 노쇠와 소멸, 그리고 자기관리의 실패로 인한 결과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다. 이런 착각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애완견이나 유기견의 수준에 맞춰두고, 또 그에 걸맞게 ‘개 같은 인생’을 산다고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에게 털은 마치 애완견처럼 멋진 자기 모습, 자신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외로운 늑대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털이 빠지는 것은 털갈이요, 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봄의 소생일 뿐이다. 자기 삶에 대해 처절한 건투를 빌 수 있는 자에겐 털이 빠지든 말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개 같은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완견들이 사라지고 야생 늑대들이 활보할 수 있는 환경의 복원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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