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7

2009.03.17

인간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수도원의 비망록’

  • 왕상한 서강대 법학부 교수 shwang@sogang.ac.kr

    입력2009-03-12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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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옮김/ 해냄 펴냄/ 623쪽/ 1만4800원

    ‘수도원의 비망록’은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최근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원작자로 잘 알려진 포르투갈 문호, 주제 사라마구의 유일한 러브 스토리다. 사실 이 책은 작가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전 출판됐는데, 이번에 다시 발간된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처음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을 접한 독자라면 조금은 다른 면을 느껴볼 수 있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답게 이 소설도 배경은 포르투갈의 왕정시대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결코 과거의 인물에 국한돼 있지 않다. 하늘을 나는 기계를 남몰래 만들고 있는 바르톨로메우 신부와 상이용사인 발타자르,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가진 블리문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왕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던 시절, 발타자르는 충성심에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나간 전쟁에서 한쪽 손을 잃는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에서 인물 간의 개연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발타자르와 바르톨로메우 신부, 블리문다의 만남에 극적인 요소는 없다. 그저 운명이 마술이고, 마술이 운명인 상황에서 그들은 만나고 사랑하고 같은 목적을 위해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든다.

    때는 종교재판이 존재하는 절대 신성의 시대였다. 따라서 과학보다는 신을 향한 무조건적 숭배가 왕에 대한 복종과 함께 당연히 요구됐다. 그렇다고 신부와 두 사람이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려는 이유가 불순하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에게 다가가려는 방법의 일환이었다. 신이 내려다보는 그 땅에서 사람은 병들어 죽어가고 믿음은 사라지고 있었기에, 그들이 기계 만들기에 열중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지키고자 한 신앙의 다른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상이군인 발타자르를 통해 가진 것 하나 없이 순수하게 신앙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대변했고, 박식하고 권력을 가진 바르톨로메우 신부를 통해 지식인들이 ‘앎’이라는 것을 통해 얼마나 종교적으로 약해져가는지 보여주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진 블리문다를 통해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저자는 결코 종교가 해결해줄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된 인류는 신이 만든 이 복잡하고 난해한 세상 속에서 부딪치며 살고 있다. 신만이 설명해줄 수 있는 순간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소설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주제 사라마구는, 문장이 술술 읽히거나 다 읽고 난 다음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래서 ‘눈먼 자들의 도시’만을 읽고 글이 재미없다며 한쪽으로 밀어놓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번에 개정돼 나온 책도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하지만 노벨상은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다. 주제를 잃지 않고 극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시대 상황이나 갈등을 유지해나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묘미가 바로 이 책에 있다.

    사랑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작가지만, 그래도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영원한 사랑을 묘사한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의 것을 그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대의 것을 그의 것으로 주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것과 그대의 것이라는 구별이 사라질 때까지….”

    혼인서약 대신 써도 좋을 명대사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세 사람이 만든 하늘을 나는 기계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하늘을 날게 된다. 그리고 그 기계가 하늘을 나는 것을 사람들은 본다. 하지만 그 시대는 앞서 말했듯 과학을 믿는 것이 불경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으면 혹시 신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성찬을 통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인간이 성찬을 받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이 원할 때마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를 원할 때마다 존재한다.”

    이 구절이야말로 신에게 기도하기보다 과학으로 하늘을 날기 원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올 법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늘 구원과 천국에 목말라하지만 결국 인간이란 욕망이라는 면죄부를 가지고 발전을 위해 몸부림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

    “우리는 어떤 개인적인 의도를 가지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지만, 기도는 스스로 자기 길을 선택하여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기도가 먼저 도달하도록 시간을 지체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기도와 뒤섞여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맹목적으로 하늘을 향한 기도만을 드리기에 인간은 너무나 자신을 사랑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통렬하게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고, 결국 그 본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가다. 아마도 이러한 작품 성향은 그가 절필하고 공산당 활동에 전념하던 시절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력이 주는 충격은 그가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19년을 절필하고도 다시 많은 작품을 쏟아내고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도 누릴 수 있는 저력이 아닐까 싶다.

    여든여섯 나이가 무색할 만큼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그가 다시 한 번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내놓는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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