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7

2009.03.17

“멀쩡한 버스 불타고, 내 속도 다 탔죠”

대우버스·대우차판매 소송 준비하는 안재엽씨 “소비자가 통사정 … 기업 횡포 바로잡을 것”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3-12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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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쩡한 버스 불타고, 내 속도 다 탔죠”

    교환받은 버스 앞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서를 들고 있는 안씨.

    대구에서 20년 넘게 관광버스 기사로 일한 안재엽(52) 씨는 요즘 자신 소유의 관광버스를 볼 때마다 우울해진다. 손님이 줄어서도 아니고 펀드가 ‘반 토막’ 나서도 아니다. 지난해 이맘때 최신형 버스(대우버스 FX-212)를 샀을 땐 콧노래가 절로 났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기사들의 부러움 속에 신나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요즘은 달려도 한숨이 난다.

    안씨가 차를 인수한 것은 지난해 3월20일. 일부 옵션을 포함해 차값만 1억6800만원이었다.

    “정말 신났죠. 매일 세차하며 흐뭇해했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7개월 동안은요.”

    차량 교환까지 ‘고난의 행군’

    지난해 10월26일. 그날도 승객 32명을 태우고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달렸다. 포항 방향 4.5km(대구 도평동) 지점을 지날 무렵 백미러로 차량 엔진 부분에서 연기가 솟는 것을 보고 급히 차를 갓길에 댔다. 계기판의 엔진회전계(RPM)나 온도계 수은주가 치솟는 등의 이상 징후도 없었다. 승객을 하차시키고 차량에 비치된 소화기 2대로 엔진 쪽에 붙은 불을 껐지만 중과부적. 엔진룸을 다 태운 화염은 깨진 유리창 안으로 파고들었고 서서히 앞쪽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는 앞좌석 일부를 빼고는 전소 상태.



    달리던 버스에 불이 난 사고라 신문과 뉴스도 이 소식을 알렸다. 비록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때부터 안씨는 차량 교환까지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출고한 지 7개월밖에 안 된 새 차나 다름없는 차량이, 그것도 잘 달리다 갑자기 불이 났으니 그의 생각처럼 ‘상식적으로 해결될 일’로만 믿었다. 사고 다음 날 대우자동차판매, 그리고 엔진을 제작한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가 사고 차량을 확인하고는 보상에 대해 말을 꺼냈다.

    “50% 보상해주겠다고 하다가 항의하니까 60%, 70%, 80%까지 올라갔어요. 새 차로 교환해달라고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결국 대우 관계자들은 사고 20일 뒤 “이미 만들어진 차량이 있다”며 인수 의향을 물었다. 버스는 보통 주문제작 방식으로 생산한다.

    “원래 차량보다 선택사양(옵션)이 적어 600만원 싼 차량이었지만 가을 행락철을 감안해 수락했어요. 관광업은 한철 장사거든요.”

    사고 차량에 들어간 인테리어 비용(1700만원)도 얘기했지만 면박만 당했다. 혹여 차를 받지 못할까 다음부터는 얘기도 못 꺼냈다고 한다.

    하지만 노조 파업과 결제 지연 등을 이유로 차량 인계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안씨는 발을 굴러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관할 경찰서를 찾아 화인(火因) 조사를 위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감정을 요구했다. 최악의 경우 권리 주장이라도 하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국과수로부터 “발전기 단자와 직결된 배선의 단락지점이 최초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며, 주울 열(전류가 흐르면서 도체에 생기는 열)에 의해 발열 현상이 일어났고 주변 가연물에 불이 붙어 화재가 난 것으로 사료된다”는 감정 결과를 받았다.

    “멀쩡한 버스 불타고, 내 속도 다 탔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엔진룸(아래)에서 발생한 화재로 전소한 안재엽 씨 차량.

    감정 내용을 알리고 통사정하기를 수십 번. 고성도 오갔고 소송도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까지 가족을 부양하고 변호사 비용 댈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성과 없이 두 달이 지나면서 할부금을 내지 못하자 이번엔 할부금융사에서 연체이자까지 내라며 독촉했다.

    “버스를 살 때는 특정 캐피탈을 이용해야 한다며 선택을 강요하더니, 사고 때문에 연체되자 이자까지 내라더라고요. 기가 찼죠.”

    수면제에 의존해 잠이 드는 날이 잦아졌고 아내도 우울증으로 한의사를 찾아야 했다. 극단적인 행동을 할까봐 아내는 그에게 수면제를 한 알씩만 건넸다. 우여곡절 끝에 석 달 만에 ‘약속의 차’를 받았지만 산 넘어 산. 오디오 설비와 커튼, 의자 시트 등 인테리어 비용을 보상받을 길이 막막했다.

    “관광버스는 연한에 따라 값 차이가 많이 나요. 그런데 지난 1월에 인계한 버스가 2008년 출고 차량이더라고요. 그건 그렇다 쳐요. 인테리어 비용 날렸죠, 차값 손해 봤죠, 일도 못했죠. 이걸 다 어디에 호소합니까. 나는 운전한 죄밖에 없는데….”

    급발진·화재는 운이 없는 일?

    3개월간의 투쟁 끝에 원하던 차를 받았지만 그는 뒤늦게 소송을 준비 중이다.

    “멀쩡한 차에 불이 났으면 제조업체는 적극적으로 해결해줘야 하지 않나요. 차량 보상을 미루는 통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기업의 횡포 앞에서 힘없는 설움을 많이 겪었죠. 저 같은 사례가 또 생기면 그 운전자는 저처럼 당하겠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변호사 사무실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업체 관계자와 차량 전문가들은 과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제조업체의 관행과 사고 발생 시 대처 매뉴얼 부재, 소비자 불신 등 복합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우자동차판매 관계자는 “차량 배선이 문제라면 대우버스가, 엔진이 문제라면 두산이 책임을 지지만 100% 과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서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업계”라며 “고객 처지에서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1년에 1만대가 생산되면 1, 2대에 (사고 차량처럼) 불이 나는데 (안씨는) 이런 경우”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 비슷한 화재사고가 있었는데 (차량 교환까지) 6개월이 걸렸다”며 “안씨는 그나마 (보상에) 성공한 케이스”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차량 급발진 사고나 화재 사고는 사실 ‘운이 없다’고밖에 할 수 없다. 업체 측에선 인정하지 않지만 이런 사고에 대한 매뉴얼이 있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시민연합 임기상 대표는 “차량 결함 관련 소송을 제기하면 소비자는 약자가 된다. 업체는 모든 시스템 연구시설과 전문기술을 갖춰 소송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나마 소송이라도 제기해야 (제조업체와) 합의가 되고 최소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풍토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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