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2

2009.02.10

대학가 ‘알부자’를 아십니까?

‘알바로 부족한 학자금 조달’ 뜻하는 신조어 … 겨울방학이 더 힘들다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9-02-05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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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가 ‘알부자’를 아십니까?
    긴겨울밤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대학생 이모(21·부산) 씨는 24시간 편의점에서 담배 한두 갑 사러 오는 손님들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시급 5000원에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각박한 겨울방학을 보낸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일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편의점 일을 마치는 저녁시간이면 터덜터덜 두 번째 아르바이트 직장인 호스트바로 향한다. 호스트바를 찾는 손님은 두 부류다. 돈 많은 사모님, 혹은 스트레스 풀러 온 주점 도우미. 이씨는 이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말동무를 해준다. 노래를 부르라는 요청에는 순순히 응하지만 ‘그 이상’의 요구는 요령껏 피한다.

    “작년 3월에 친구 소개로 가끔 (호스트바에) 나왔어요. 등록금 걱정 때문에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일했고요. 운 좋은 날은 하룻밤에 50만원도 벌지요.”

    영어학원, 스키장? 꿈도 못 꿔

    이씨는 고위 공무원인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다. 어머니가 구한 일은 분식집 주방 보조. 친가에서 학비를 대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기당 440만원의 학비와 용돈을 스스로 충당했다. 이씨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12시간 일해도 고작 6만원밖에 못 벌기 때문에 호스트바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스스로 떳떳하고 싶기에 편의점을 그만두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이씨의 전공은 영상학. 고등학생 때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다. 그러나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과 공부에 매진할 수도,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호스트바에서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엔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게 돼요. 그래도 호스트바 대기실에서 틈틈이 전공서적 읽고 영어단어장을 들여다봐요. MT는 가지 않아요. 술 마시고 놀기 바쁜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화도 좀 나거든요.”

    대학가에 ‘알부자’ 대학생이 늘고 있다. 알부자란 ‘알바(아르바이트)로 부족한 학자금을 대는’ 이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최근 ‘대학내일’과 한국리서치가 서울 소재 남녀 대학생 1014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1%(21명)가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자금 대출을 받는 학생도 11.2%(114명)나 됐다. 용돈을 ‘스스로 번다’고 응답한 비율도 23.3%에 달했다.

    대학가 ‘알부자’들은 수업시간 외 시간을 대부분 아르바이트에 할애한다. 자연히 학업에 매진할 수도, 대학생활을 즐길 여유도 없다. 지금과 같은 겨울방학은 이들에게 이른바 ‘대목’. 학기 중보다 두 배는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다. 방학 동안 영어학원에 다닌다거나 자격증 공부를 할 시간은 없다. 스키장 여행은 ‘알부자’ 대학생들에겐 언감생심이다.

    대학 진학이 흔치 않던 1960, 70년대 고학생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수재’라는 사회적 존경을 얻었다. 그러나 2000년대판 고학생이라 할 ‘알부자’들은 사회적 대우는커녕 하찮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얻으면 다행이다.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아르바이트마저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 아르바이트 중개사이트 알바몬이 지난해 12월 2주간 게재된 아르바이트 건수를 조사한 결과 전년 동기보다 8% 적은 6만여 건이었다. 반면 신규 등록된 이력서 수는 전년 대비 38%나 늘었다. 일자리는 주는데 일자리 구하려는 대학생들이 자꾸만 늘고 있는 것이다.

    지방 국립대에 재학 중인 김모(25) 씨는 보습학원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호주 어학연수 경험이 있는 그는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학원 사정이 어려우니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경기침체 여파로 수강생이 줄자 강사 줄이기가 불가피했던 것. 김씨는 “원장이 ‘내 아내가 직접 강의에 나서야 할 만큼 학원 사정이 나빠졌으니 이해해달라’고 했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대신 과외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지만 워낙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대학생이 많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대학가 ‘알부자’를 아십니까?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 ‘알바몬’의 구직 게시판.

    친구 만나기도 어려운 팍팍한 현실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방모(21·여) 씨는 방학이 되자마자 사무실 밀집 지역 레스토랑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불황 탓에 손님이 줄었는데 방학 때는 사정이 더 좋지 않아 ‘고용 유지’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급 5000원에 하루 5시간 일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한 기쁨도 잠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식당도 불황을 피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손님보다 종업원이 많은 날이 잦았다. 방씨는 “결국 아르바이트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잘렸다”며 답답해했다.

    ‘알부자’ 대학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불황만이 아니다. ‘저렴한’ 인건비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잠식하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들도 만만치 않은 경쟁상대. 경희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중국인 유학생 탕모(23) 씨는 “나처럼 생활비도 벌고 한국어를 익히려고 아르바이트하는 중국 학생이 많다”고 전했다. 경희대 근처 한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그는 시급 4500원을 받는다고 했다. 탕씨는 “외국인 유학생 시급이 한국 학생보다 500원 정도 적어 식당 주인들도 외국인을 선호한다”고 귀띔했다.

    서울 소재 전문대에 다니는 양모(24) 씨는 인터넷 메신저 대화명이 ‘한량’이다. 한량처럼 살기 때문이 아니라 한량처럼 살아봤으면 해서다. 그는 “돈 걱정도, 앞날에 대한 걱정도 없이 며칠만이라도 편안하게 지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역시 ‘알부자’인 양씨는 친구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면 선약이 있다고 둘러대거나 “돈이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용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담배도 줄였다. 그러나 정작 경호원 아르바이트는 그만두고 컴퓨터 관련 자격증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음 학기 등록금 356만원은 학자금 대출로 해결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졸업 전까지 무이자로 학자금 대출을 받았어요. 취직한 뒤 갚아나갈 생각입니다.”

    편의점과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이씨와의 인터뷰는 인터넷 메신저 대화로 이뤄졌다. 자정부터 시작한 대화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그는 “3시간 뒤엔 편의점으로 출근해야 한다”며 “그 전에 밥을 좀 먹어야겠다”고 했다. ‘알부자’ 대학생은 팍팍한 현실을 향해 그렇게 로그아웃했다.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김정(서강대 중국문화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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