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2

2009.02.10

법은 부부 이불 어디까지 들추나

첫 부부강간죄 판결 이후 논쟁 가열 … 처벌 기준 논의 시작할 때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9-02-02 15:3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법은 부부 이불 어디까지 들추나
    결혼하면서 한국으로 온 필리핀 여성 V(25)씨는 지난해 7월 한국인 남편 L(43)씨를 성폭력특별법상 특수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남편은 그가 생리 기간 중 잠자리를 거부하자 가스분사기와 과도를 겨누며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칼로 유두와 음부를 자르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L씨는 폭행과 협박으로 끝내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지난 1월16일 부산지법 제5형사부는 L씨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음을 밝힌 국내 첫 판례로 큰 관심을 모았다.

    지금까지 법원은 ‘실질적인 부부관계’에 있는 배우자는 강간죄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부부는 상대방의 성관계 요구에 응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학계와 여성계, 인권단체 등을 중심으로 “부부강간은 배우자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인격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범죄”라는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문에서 “자신의 부당한 욕구 충족만을 위하여 처의 정당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무시하고 …차마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 피고인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적시해 이 같은 의견을 수용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부부간 문제에 법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판결 나흘 뒤 남편 L씨가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법원의 판단이 신중했느냐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국선변호인으로 L씨의 변호를 맡았던 감덕령 변호사는 “피고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부부 사이 문제를 칼로 무 자르듯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다양한 상황, 칼로 베기 가능한가

    V씨는 2006년 L씨와 결혼하면서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남편의 폭행과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4개월 뒤 가출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2008년 7월. 경남 김해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V씨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불법체류자로 붙들렸기 때문이다. L씨는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고, 닷새 정도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지다가 생리가 시작되자 강간을 저질렀다. 감 변호사는 “L씨는 자신을 국제결혼의 피해자로 여겼다. 본인이 왜 처벌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자살을 부른 것 같다”고 말했다. “부부 사이에 강간죄를 적용하려면 부부 관계가 파경에 이르렀거나 남편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경우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윤용규 강원대 법학과 교수도 “이번 사건의 경우 폭행과 협박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강간죄가 인정된 듯 보이는데, 이 판결을 일반화해서 다른 사건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일상적으로 성관계가 이뤄지는 부부 관계 속 배우자와 일반 여성을 똑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윤 교수는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는 폭행이나 협박, 강제추행 등의 조문으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 배우자 일방을 ‘강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부부 사이 문제에 형법이 과도하게 개입하면 가정의 신뢰 관계를 파괴할 수 있고, 여성이 이혼과정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고소를 남용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송광섭 원광대 법학과 교수는 “실무에서 경험한 부부강간 사례는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각각의 경우마다 전후 사정을 신중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부부 사이라도 성폭력이 발생할 경우 법이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이상원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혼인 의사는 성교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상대방에게 언제나 성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며 “설령 그런 권리가 있더라도 불법한 방법으로 했을 때는 적법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명숙 변호사도 “일반인 사이에서의 강간은 엄격하게 처벌하면서 부부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행과 협박, 가혹한 성폭력을 참으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변호사는 “부부강간을 인정한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뜻에 반해 성관계를 하는 경우 모두가 강간죄로 단죄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번 사건처럼 보통 사람 누구나 ‘너무했다’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심각한 사건만 부부강간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혼 전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 변호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때문에 이혼을 고민하는 여성 중 절반가량은 부부강간 피해자. 가혹한 폭행과 학대 이후 강압적인 성관계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가운데 남편을 신고해 법정에 세우는 이는 거의 전무하다고 한다.

    “재작년 저를 찾아온 한 50대 여성은 결혼생활 30년 내내 남편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했다고 했어요. 남편은 기분이 나쁘면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 무자비하게 때린 뒤 자신이 실신하면 물을 끼얹어 깨우며 강간했다고 하더군요. 그의 남편에게 성관계는 화해의 수단이 아니라 가장 가혹한 학대의 방법이었어요. 그런데 이 여성은 견디다 못해 이혼하기 위해 절 찾아오고도 남편을 강간죄로 고소하는 건 반대하더군요. 수치스럽기 때문이죠.”

    이 변호사는 “여성 대부분은 자신이 남편한테 성적인 괴롭힘이나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걸 꺼린다. 통계를 보면 강간 피해자 100명 중 4명 정도가 가해자를 고소하는데, 부부강간이 인정된다 해도 남편한테 강간당한 사실을 신고하는 비율은 이보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적 자기결정권” vs “과도한 형벌권 남용”

    그럼에도 논란이 계속된다면 입법을 통해 부부강간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05년 홍미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부부강간의 처벌을 명시한 가정폭력특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법개정에는 실패한 적이 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법안에는 ‘배우자에게 성적 위해를 가하는 것’을 가정폭력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구체적인 처벌 기준은 ‘폭행이나 협박이 있을 경우’로 정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현재 민주당 여성리더십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홍 전 의원은 “단순히 배우자의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맺은 경우는 처벌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때리면서 성폭행하거나 때린 뒤 강간한 경우, 폭행으로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흉기 등을 이용해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를 조성한 뒤 성관계를 맺은 경우 등 누가 봐도 강간이 명백한 사건을 강간죄로 처벌하려 했던 법안”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남편을 발정난 짐승으로 취급하려 한다’ ‘교도소에 자기 마누라랑 성관계를 했다고 들어오는 남자들이 많아지겠다’ 등 누리꾼의 항의가 줄을 이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부부강간죄 인정은) 부부 재결합이나 원만한 합의, 자녀양육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서 반대 입장을 밝혔고, 이승환 변호사는 “부부강간죄가 성립되면 전통적인 가족개념이나 부부관계는 유지되기 힘들다”며 반발했다. “민법상 부부는 동거의무가 있고 거기에는 성생활을 함께할 의무도 내포돼 있다. 본인의 의사에 다소 반하더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의무인데 부부강간죄는 이러한 의무사항을 무력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이 변호사는 이번 부부강간죄 인정 판결에 대해서도 “이 판결이 상급심에서도 인정될지 미지수다. 부부가 다툰 후 남편이 약간 거칠게 애정을 표현한 것까지 강간죄로 단죄하면 부부관계는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다. 국가형벌권이 혼인생활의 내밀한 부분까지 감시할 경우, 부부간 성관계 거부죄나 부부명예훼손죄 같은 형벌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법원이 이미 판례를 통해 부부강간죄를 인정한 만큼 지금이라도 국회나 학계에서 확고한 기준을 세워 법 적용의 혼란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법률신문이 판결 직후 형법학자 3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8.1%에 해당하는 25명이 이번 판결에 찬성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따라 학계와 여성계 등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별거 또는 이혼소송 중인 아내를 성폭행할 경우 제한적으로 강간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 폭행·협박을 동반한 강압적 성관계는 모두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입장, 배우자가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한 것도 강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등이 있다.

    사회 인식 변화 노력 병행도

    입법이나 처벌에 대한 논의와 함께 사회 인식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은경 박사는 “이번 판결은 부부강간이 불법적인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지만, 가해자가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끝내 납득하지 못한 채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큰 숙제를 던졌다”며 “아내 학대가 오랫동안 묵시적으로 인정돼온 만큼 가해자를 무조건 처벌하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범죄 행위를 인식하고 스스로 교정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 시스템을 함께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가정폭력특례법을 통해 폭력 남편에게 사회봉사 명령 등을 내리는 것을 참고하면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명숙 변호사는 “길을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옷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분명히 강제추행이지만, 아내가 원하지 않을 때 남편이 옷 속에 손을 넣는 것은 강제추행이라고 할 수 없다. 아내가 싫다는데 손목을 끌어당겨 성관계하는 정도를 강간죄로 볼 판사도 없다. 일반인이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불법’과 ‘합법’의 범위에서 부부강간 문제에 접근하면 남녀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정한 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강간죄 적용 세계적 흐름

    20세기 말부터 논의 … 유엔도 범죄에 포함시켜


    “혼인 계약 때 아내는 남편이 성관계를 원하면 언제든 응한다는 ‘철회할 수 없는 동의’를 한 것으로 봐야 한다.”

    17세기 영국의 매튜 헤일(Matthew Hale) 판사가 내놓은 이 판례는 이후 300년간 서구 사회를 지배했다. 부부 사이의 강제적 성관계가 문제 될 때마다 법원은 ‘철회할 수 없는 암묵적 동의 이론’을 내세웠다. 부부강간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20세기 말부터. 1984년 미국 뉴욕주 항소법원이 “혼인증명서가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여성도 미혼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고 판시한 게 신호탄이 됐다. 재판부는 별거하던 아내를 강간한 남자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이 판결 이후 서구에서는 ‘부부강간’이 법적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관련법 제정이나 판례 변경 등을 통해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간을 처벌하는 국가가 나타난 것도 이 무렵부터다.

    현재 미국의 모든 주는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영국도 91년 최고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판례를 변경해 부부 사이 강간을 인정하고 있다. 독일은 97년 강간죄 성립요건을 다룬 형법 조항에서 ‘혼인 외의 성교’라는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아내도 강간죄의 객체가 될 수 있게 했다.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역시 부부 사이의 성폭력을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일본은 계속적인 성관계를 전제로 하는 부부간에는 강간죄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지만, 혼인관계가 실질적으로 파탄난 경우에 한해 강간죄를 인정한다. 남편이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간 아내를 찾아낸 뒤 친구와 함께 폭력을 사용해 강간한 사건에 대해 “남편과 제3자가 폭력을 사용해 공동으로 처를 강간한 경우 남편은 당연히 강간죄의 공동정범이 된다”고 판시한 판례가 있다.

    유엔인권이사회는 96년 ‘아내 강간’을 가정폭력의 범주 안에 포함시켰고, 부부 사이 강간을 형사 범죄로 보지 않는 국가에는 개선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99년 아내 강간을 범죄로 인정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부부강간죄 관련 국내 법률과 판례의 변화

    무죄 → 강제추행죄 → 강간죄


    대법원은 지난 1970년 “처가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는 남편을 상대로 간통죄 고소와 이혼소송을 제기하였으나 그 후 부부간에 다시 새 출발을 하기로 약정하고 간통죄 고소를 취하한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서 강제로 처를 간음하였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되지 아니한다”고 판시(70도29), 부부강간죄를 부정했다.

    당시 강간은 ‘정조의 죄’ 장에 포함돼 있어 남편이 아내의 정조를 침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었다. 그러나 1995년 국회는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를 ‘강간 및 추행의 장’으로 독립·편제함으로써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부녀자의 정조’가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 2004년 서울중앙지법은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폭행하고 강간한 사건에서 “혼인한 부부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응할 의무는 있지만 각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부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전히 보호돼야 한다”(2003고합1178)며 부부 사이에 강제추행죄의 성립을 인정했다.

    2009년 부산지방법원은 남편 L씨가 실질적으로 결혼 관계에 있는 부인 V씨를 강간한 사건에서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선언한 이상 문명국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반영한 반성적 고려에 기인한 것”(2008고합808)이라며 기존의 판례를 변경하고 남편에게 강간죄를 적용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