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1

2009.01.27

평화가 사는 아름다운 시골마을

인도 부다가야

  • 박동식 트래블게릴라 멤버 www.parkspark.com

    입력2009-01-29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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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사는 아름다운 시골마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박하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인도 부다가야는 나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적인 도시로 남아 있다.

    버스 지붕은 만원이었다. 승객들의 짐보따리와 지붕까지 올라탄 승객들의 모습은 폭격을 피해 어디론가 떠나는 피난민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차장은 달리는 버스의 지붕까지 올라와 요금을 받았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는 지붕을 이리저리 다니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금을 챙겼다. 내려갈 때도 창문을 통해 버스 내부로 돌아갔다.

    버스 지붕은 즐겁고 재미있었다. 달려드는 나무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두어 번은 나뭇가지에 머리를 그대로 얻어맞았다. 작은 나뭇가지라 해도 달리는 버스 위에서 얼떨결에 얻어맞다 보니 통증이 제법 컸다. 이후부터는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가 나뭇가지가 다가올 때면 몸을 납작 엎드리고 머리를 숙였다. 버스 지붕에 올라탄 모든 승객이 일제히 같은 동작을 해 보였기에 나뭇가지를 피할 때의 모습은 마치 잘 연습된 매스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들 정확하고 신속했다.

    사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릭샤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버스 정류장은 비어 있었고 릭샤 기사는 버스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며 릭샤를 이용하라고 호객했다. 기사는 몸값 5루피에 배낭 운임비 5루피를 추가로 요구했다. 배낭 운임비가 부당하게 느껴져 주지 않으려 했지만 오랜 관행인지 기사의 태도는 완강했다. 10루피를 지급하고 배낭을 지붕에 올린 뒤 릭샤에 올라탔다. 기사는 추가로 손님을 불렀고 결국 비좁은 좌석에 7명이나 태웠다. 손님이 늘어나자 기사는 릭샤 지붕에 두 명의 소년을 손님으로 받았다.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배낭 안의 물건이 분실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릭샤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가 릭샤를 붙들고 몇 분이나 끙끙거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엔진 뚜껑을 열고 이것저것 만져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정류장에 빈 버스가 도착했다. 미안했지만 환불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사는 들은 척도 않고 시동 걸기에만 열중했다. 그도 10루피가 아깝겠지만, 그렇다고 여행객인 나도 바로 옆에 빈 버스를 두고 언제 시동이 걸릴지 모르는 릭샤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큰소리를 내고서야 기사는 돈을 내주었다.

    버스는 비어 있었지만 나는 곧바로 지붕으로 올라갔다.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지붕에 올라탄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었다. 기회는 오늘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첫 손님이었는데 버스가 출발할 때는 통로는 물론 지붕까지도 승객들로 빼곡했다.



    버스가 부다가야에 다가갈수록 주변 풍경은 장막을 한 꺼풀씩 벗어던지듯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인공적으로 가꾼 듯한 천연잔디와 가끔씩 들어선 늘씬한 나무들. 가로수 그늘이 길게 드리운 도로 왼쪽으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 건넜다는 ‘니란자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인도를 여행하는 두 달 내내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는 처음이었다.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던, 한가하게 풀을 뜯는 물소의 모습도 그 순간만큼은 연출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를 꼽으라면 아마도 나는 부다가야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수년 만에 다시 찾은 부다가야는 조금 낯선 모습이었다. 큰 그림에서 보면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곧 있을 달라이라마의 법회 때문에 수많은 인파가 연달아 부다가야로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방값은 하루가 다르게 올랐고 법회 기간에는 선금을 준다고 해도 예약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나는 번잡한 중심지를 외면하고 자전거를 빌려 좀더 먼 곳을 배회했다. 오래전 버스 지붕에 올라타고 지나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2500년 전 생의 고뇌와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한 명상에 잠겨 고행을 거듭했던 석가모니가 지쳐 쓰러졌을 때, 귀한 젖죽을 공양한 수자타가 살던 마을을 찾아가기도 했다.

    소박한 사람들과 조막만한 토담집들, 그리고 수천 년을 흐르고도 마르지 않는 강줄기. 이들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다. 수년 전 가장 인상적인 도시로 부다가야를 꼽았던 나의 선택은 여전히 유효하구나. 비록 겉모습은 달라졌어도 시골마을 부다가야는 내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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