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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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개헌 ‘3차원 방정식’

정치권 공론화 초읽기 돌입… ‘친이 vs 친박’ 이해 엇갈려 정치 투쟁 뇌관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8-12-16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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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같은 경제위기에 한가하게 그런 논의를 할 때가 아니에요. 그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다른 (정치적) 속셈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개헌 얘기를 꺼내자 친이명박(친이)계의 한 의원이 보인 반응이다. 날카로웠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내에 개헌 논의 금지령을 내린 상태다. 그러나 친박근혜(친박)계의 한 의원의 반응은 달랐다.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 공감하고 있는 점 아닌가요? 어떤 식으로든 바꿔야죠. 내년밖에는 시간이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먼저 공론화했다가는 무슨 오해를 받을지….”

    그는 개헌 문제를 거론하는 게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흘렀다. 그러면서 “내년 봄 정치적으로 혼란한 와중에 어느 순간 누군가가 개헌 논의에 불을 붙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청와대 개헌 문제 알레르기 반응



    개헌 문제에 대한 친이계와 친박계의 반응 차이는 이처럼 크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두 계파의 간극이 그만큼 벌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청와대와 친이계가 개헌 문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개헌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이 가중될 경우 자칫 조기 레임덕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가장 크다. 또 하나는 2012년 4월 총선 때 대통령선거를 동시에 치를 경우 대통령 임기가 8개월 정도 줄어들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나 친이계는 개헌 문제의 공식적인 논의 자체를 최대한 미루려는 의지가 강하다.

    반면 박근혜 전 대표나 친박계 의원들은 느긋하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게 없다는 반응이다. 오히려 이익이면 이익이라는 것. 개헌 논의는 현 권력자보다 차기 유력 대권주자에게 힘이 쏠리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연구 중인 개헌 방향과 분위기도 박 전 대표 측에 유리한 쪽으로 조성되고 있다. 현재 정치권에는 여야 의원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만든 ‘미래한국헌법연구회’(이하 헌법연구회)와 김형오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연구 자문위원회’ 등 두 축에서 개헌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헌법연구회는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 민주당 이낙연 의원, 자유선진당 이상민 의원 3명이 올 5월 공동 발기인으로 출범시킨 국회 내 공식 연구모임이다. 2007년 초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유보 조건으로 여야 6개 정당이 18대 국회에서 개헌하기로 합의한 약속을 지키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 지금까지 187명의 여야 의원이 회원으로 참여한 상태다.

    이 모임은 그동안 국회 토론회, 지방순회 토론회, 쟁점별 세미나 등으로 거의 매주 열렸다. 하지만 이 모임에서도 가장 민감한 쟁점 사안인 권력구조 개편 방향에 대해서는 소속 당별 의원들의 처지가 엇갈린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4년 중임 정·부통령제를 선호하고, 민주당은 이원집정부제, 자유선진당은 내각제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

    한나라당이 172석의 거대 정당인 데다 민주당도 집권 당시 대통령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는 의원이 많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대세는 대통령 4년 중임 정·부통령제인 셈이다. 이는 권력 구조에 대한 박 전 대표의 평소 소신과도 같다.

    헌법연구 자문위원회에서 논의하는 방향도 분권화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의장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위원회 회의에서 권력 분점을 위한 실질적 조치들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또 총리제를 없애고 의원과 장관직 겸직이 불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 같다”고 전했다.

    여야 정치권에서 내각제는 국내 현실과 맞지 않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루는 마당에 이 관계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것 또한 대통령 4년 중임 정·부통령제와 일맥상통한다.

    정치권 내 공식적인 개헌 논의 시점도 경제위기 상황을 넘긴 이후로 미뤄지기를 바라는 청와대와 친이계 의원들의 희망과 달리 빨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포용 못한 이명박 대통령 책임?

    헌법연구회 모임을 주도하는 이주영 의원은 “2010년 5월 지방선거 이전에는 개헌 문제가 마무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이르면 내년 초, 늦어도 내년 중반부터는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개헌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나뿐 아니라 민주당 이낙연 의원, 자유선진당 이상민 의원을 포함해 상당수 의원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헌법연구 자문위원회의 일정도 개헌 논의 공론화 초읽기에 들어갔다. 의장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위원회는 올해 연말까지 중간 보고서를 작성해 내년 1월 둘째 주나 셋째 주부터 매주 공청회와 세미나를 열고, 그 결과를 모아 2월 말 최종 보고서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당장 내년 1월부터 개헌 논의에 공식적으로 불을 지피겠다는 뜻이다. 이는 친박계 의원들이 내심 바라고 있는 바다.

    박 전 대표나 친박계 의원들이 가장 바라는 정치 구도는 지금의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박 전 대표에게 ‘러브콜’을 보내오거나, 당 지도부와 친이계가 친박계에게 국정운영에 적극 동참해달라고 요구해오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이 대통령이나 측근들이 박 전 대표와 국정운영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분명히 하면서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현 상황이 우리에게는 최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당내 친이계 일각에서 박 전 대표가 국정운영의 한 축을 맡아 이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친박계는 물론 한나라당 내 고위 당직자들도 상당한 의문을 제기한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일부 친이계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만 속내는 다를 것”이라면서 “박 전 대표가 정말 이 대통령을 돕겠다며 전국 민심투어에 나서는 순간, 정국 주도권은 박 전 대표에게 완전히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당직자는 “박 전 대표와 친박계는 이래저래 최고의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친박계 의원들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이 대통령이 후계 권력을 박 전 대표에게 주지 않기 위해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와 손잡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다. 또 다른 친박계의 한 의원은 “3~4개월 전부터 이런 내용의 개헌 괴담이 정치권에 나돌고 있다. 이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는 한 괴담 같은 국면 전환용 카드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지만 은근히 우려하는 듯했다.

    18대 국회가 처리해야 할 최대 어젠다인 개헌 문제의 주도권은 분명 이 대통령이 아닌 박 전 대표에게 있다. 이런 상황을 몰고 온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이 대통령이라는 지적이다. 친이계의 한 고위 당직자는 “개헌은 아무리 경제위기라 해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이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조율해야 할 국가 어젠다를 놓친 것이 가장 큰 실수”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집권 초기에 개헌 논의를 시작할 경우 국론 분열과 레임덕이 발생하리라는 주변의 우려는 개헌 문제를 전략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 대통령이 1987년 헌법체제를 반성하고 통일 한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하는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그런 우려는 쉽게 털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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