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5

2008.12.16

‘블루스 리듬’ 탄 연설에 감동 흘렀다

오바마, 뻔한 얘기도 청중 공감 … ‘부름과 대답’ 흑인문화 녹아들어 주제 확실하게 전달

  • 뉴욕 = 김치완 문화칼럼니스트 nambawan@gmail.com

    입력2008-12-10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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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스 리듬’ 탄 연설에  감동 흘렀다

    오바마의 연설은 흑인 목사들의 설교와 닮은 점이 많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탁월한 연설능력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미국인들에게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 역시 연설을 통해서다. 2004년 당시 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을 맡게 된다.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성장배경을 들려주며 공동체로서 미국의 가능성을 말한 이 연설은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 온다. 그리고 이때 어떤 이들은 그가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2008년 미국 대선 기간 동안 그가 가는 곳에는 늘 대형 록 공연을 능가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올해 민주당 전당대회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방송된 전당대회를 통틀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여기저기서 오바마를 ‘이 시대 최고의 연설가’라 칭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니 전 세계가 오바마의 연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텍스트로 읽으면 감동 반으로 줄어”

    “오바마의 연설을 텍스트로 읽어보라. 그 감동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보스턴대학 정치학과 버지니아 사피로 교수의 말이다. 실제로 오바마의 연설을 텍스트로 접하면 구체적인 공약보다 ‘변화(Change)’ ‘희망(Hope)’ ‘네, 우리는 할 수 있어요(Yes, we can)’ 같은 추상적인 구호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연설을 오바마의 음성을 통해 들으면 오바마가 얼마나 훌륭한 연설가인지 깨닫게 된다. 뻔한 얘기라도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내 감동을 부르는 재능이 있는 것이다.



    오바마 연설방식의 원형은 상당 부분 흑인교회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의 흑인교회 와 백인이 주류인 교회는 문화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흑인교회에는 그들이 미국에 노예로 끌려오기 이전부터 따르던 모국의 종교의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흑인교회의 예배는 춤과 흥이 어우러져 좀더 왁자지껄하다.

    더불어 흑인교회 목사의 설교는 하나의 퍼포먼스다. 감정을 살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말을 멈추기도 한다. 또 흑인교회에서 설교는 목사의 일방적인 내용 전달이 아닌, 최대한 교인들의 참여와 호응을 유도하는 쌍방향식이다. 목사의 설교 중간에 “아멘!” “맞습니다!” 등의 추임새를 넣는 것은 흑인교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며, 흔히 이를 ‘Call and Response(부름과 대답)’라 한다.

    Call and Response의 흔적은 흑인문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블루스 음악에서는 주로 가수가 한 소절을 부르면(call) 이어서 밴드가 연주로 화답하는(response), 가수와 밴드 간의 ‘주고받기’ 혹은 대화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식은 재즈, 리듬 앤드 블루스(R·B), 힙합 등의 흑인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바마의 연설은 흑인 목사들의 설교나 흑인음악이 그렇듯 리듬과 음악적인 요소가 강하다.

    “오바마가 연설할 때 특정 단어들을 늘어뜨리는 방식, 그리고 연설 중간에 침묵을 활용하는 방식은 모두 흑인 교회문화에서 비롯됐다. 그의 전달방식은 흑인 목사들의 설교가 그렇듯 노래에 가깝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연설을 쓴 필립 콜린스의 말이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그의 ‘Yes, we can’ 연설이 좋은 예다. 이 연설에는 앞서 언급한 요소뿐 아니라, 흑인 목사들이 잘 활용하는 반복 패턴이 있다. 무언가 강조하고 싶을 때 ‘반복’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이는 말하기와 글쓰기뿐 아니라 음악, 디자인 등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반복을 자칫 잘못하면 강조는커녕 촌스럽고 질려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오바마는 연설에서 적재적소에 “Yes, we can”이라는 말을 넣음으로써 연설의 주제를 강렬하고 확실하게 전달한다.

    한편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강조되다 보니, 간혹 흑인 목사들의 설교는 지나치게 감정에만 호소하는 면이 있다. 한때 오바마의 종교적 스승이었던 제러마이어 라이트 목사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에 비해 오바마의 연설은 좀더 이성적이며 차분한 면모가 돋보인다. 마치 소용돌이의 핵 같다. 어쩌면 미국인들은 이러한 연설을 통해 흑인들에 대한 ‘반이성적’ 폭력 행위들에 대해 ‘이성’과 ‘비폭력’으로 대처할 것을 강조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나’ 아닌 ‘우리’로 대중과 대화

    하지만 제아무리 그릇이 좋아도, 결국에는 그 안의 ‘내용물’이 더 중요한 법이다. 이번 대선 기간 중 힐러리 클린턴과 존 매케인은 오바마의 연설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과연 그럴까. 정치인이란 천성적으로 나르시시스트적인 존재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 즉 자기 자신을 강조한다. 오바마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의 독특한 성장배경 및 위치를 미국 역사라는 거대한 틀에 넣어 설명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아이오와주 민주당 예선에서 패한 힐러리 클린턴은 지지자들 앞에서 눈물을 떨구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은데 말이죠.”

    힐러리 클린턴이 한 말의 방점은 ‘내가’에 있다. 존 매케인 역시 대선 기간 중 “내가 경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 “내가 빈 라덴을 잡을 수 있다” 등 자신을 선전하기에 바빴다. 반면 오바마는 ‘나’를 통해 ‘너’를 얘기하고, 나아가 ‘우리’를 얘기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하나 될 때 비로소 역사는 바뀐다고 했다. 그래서 “Yes, I can”이 아니라 “Yes, we can”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이 그랬듯,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이 그랬듯 역사 속 명연설들은 대중의 염원을 담고 있으며 또한 대중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지난 3월 제러마이어 라이트 목사의 인종차별적인 발언들이 도마에 올랐다. 당시 오바마는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문제에 대한 40분짜리 연설을 통해 상황을 정면 돌파한다. 노예제도를 미국 민주주의 건국이념을 더럽힌 원죄로 규정한 이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인종에 대한 새로운 대화의 창구를 열어줬다. 지난 8년간 미국은 대화하는 법을 모를 뿐 아니라, 대화 자체를 하기 싫어하는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었다. 선거 기간 내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오바마가 과연 대통령이 된 뒤에도 대중과 대화를 지속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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