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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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물씬 나는 ‘나라 밖 산책’

  • 왕상한 서강대 법학부 교수·‘TV 책을 말하다’ 진행자 shwang@sogang.ac.kr

    입력2008-11-26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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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나라 밖 산책’

    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창비 펴냄/ 290쪽/ 1만2000원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다 똑같은 여행자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기품 넘치는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고생길 찾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떠나는 이들도 있다. 홀로 떠나 외로움의 절정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왁자지껄 우르르 함께 떠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사랑을 속삭이기 위해 둘만의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여행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또 있다. 쉽게 비유해 ‘개미와 베짱이’로 나누는 방법이다. 먼저 개미들을 알아보자. 그들은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여행지를 소개하는 책과 웹 사이트를 열심히 찾아 읽는다. 그리고 빠듯한 일정을 계획한다. 여행지에 도착한 뒤엔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찾아내고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타 지역, 타 세계를 살핀다. 사진이 곧 추억이기에 그들에게선 찰칵찰칵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 사진들은 실제로 그들의 귀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베짱이들은 어떤가. 일단 계획이란 없다. 기차 혹은 비행기 표를 구매해 발 디디는 곳곳이 바로 목적지이자 여행길이 된다.

    이 세상에 개미들을 위한 여행서는 많다. 가볼 만한 식당과 상점 정보를 지도와 함께 제공하는 여행 정보서도, 가벼운 여행 에세이도 넘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베짱이들을 위한 여행서는 매우 적다. 사실 베짱이에게도 그들만의 여행 준비는 필요한데 말이다. 오늘 그들을 위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다.

    이 책은 많이 알려진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다. 근래 들어 국내 문학상의 주요 수상자이자 문제적 작가로 손꼽히는 김연수인 만큼 저자 이름만으로도 기대가 커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이 기대감의 자리에 곧 만족감이 채워질 것이다.

    여행자도 다 똑같은 여행자는 아니듯 여행서도 다 똑같은 여행서는 아닌가 보다. 1999년 도쿄에서부터 2007년 미국 버클리까지 국내외 12곳을 여행하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성찰한 내용을 김연수만의 글쓰기 방식으로 풀어낸 이 산문집은 보통의 여행서를 뛰어넘는다.



    작가는 ‘국경’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삼면이 바다이며,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넘는 즉시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남과 북을 나누는 국경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국경을 넘는 것에 대한 동경을 품어왔음을 밝힌다. 배나 비행기 외에 직접 자기 발로 이 나라의 경계를 벗어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내게도 ‘국경’의 문제는 새삼 크게 다가온다. 이렇게 작가가 사유하는 발걸음을 따라 나의 여행도 시작됐다.

    이 국경을 넘나들며 김연수가 여행하는 것은 바로 나라나 도시, 혹은 한 건물이라기보다 사람에 가깝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쉬이 ‘여행’이라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관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도시의 풍경을 눈과 사진기에 담아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타지 사람과 부대끼는, 사람 냄새 나는 참여행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김연수의 여행길은 요상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가득하다. 깐두부만 먹는 훈츈 사람 이춘대 씨를 시작으로, 버클리에서 만난 60세 히피 할머니 후사코, 중국 지린성에서 머물렀던 민박집의 수상한 주인 등 낯선 도시만큼이나 낯선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만남은 곧 김연수에게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구실을 한다. 지역, 국경, 이데올로기, 소통, 문학, 작가로서의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고 그 대답을 이끈다. 작가가 겪은 예상치 못한 여행지에서의 경험만큼이나 그의 사유는 거침없고 자유롭게 흘러간다. 국경에 대한 단상에서부터 진정한 문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사소한 웃음거리에서부터 소통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미끄러지는 김연수의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내부로 여정을 이끈다. 작가 김연수의 여행길을 따라 여행하다 보니 결국 김연수를 여행하게 된 것이다. ‘여행할 권리’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잡은 사람이라면 어쩌면 책을 덮을 즈음 작가 김연수에게 푹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읽다 보면 김연수의 재치 넘치는 단어와 글에 키득키득 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다고 해서 쉽게 읽힌다고만은 할 수 없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을 두고 계속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 가득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중 한 문장을 소개한다.

    “공항을 찾아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공항대합실에 서서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를 볼 때마다 그토록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김연수의 마지막 이 말이 나를 공항의 대합실에 데려다 놓는다. 곧 떠나갈 가을과 다가올 겨울, 스산한 날씨와 더불어 책은 여행을 부추긴다. 이 책을 한 번 더 읽은 뒤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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