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4

2008.09.30

커진다 세진다, ‘트렌드 워처’ 파워

시장 흐름 미리 읽기 남다른 선구안 … 기업 생존, 정보화 선봉장 무거운 책임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입력2008-09-22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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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진다 세진다, ‘트렌드 워처’ 파워

    트렌드 정보업체 ‘PFIN’의 트렌드뷰팀원들이 2009년 가을/겨울 유행 색상들을 모은 컬러 차트를 정리하고 있다. 현재보다 1, 2년 뒤의 미래를 전망하는 ‘트렌드 워처’들은 트렌드 읽기를 논리와 직관이 모두 필요한 ‘퍼즐 맞추기’에 비유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LG전자는 가전업계에서 라이프스타일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LG전자 최고 마케팅책임자(CMO) 더모트 보든 부사장은 9월5일부터 닷새간 프랑스 파리 ‘노르 빌팽트’ 전시장에서 열린 ‘메종 오브제(MAISON · OBJET) 2008’ 전시회에 참가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메종 오브제는 가구 등 홈인테리어 관련 유명 업체들과 디자이너들이 참가해 최신 디자인 트렌드 및 키워드를 제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전시회다. LG전자는 이 전시회에서 가전 트렌드의 키워드로 ‘에코-시크(Eco-chic)’를 제시함으로써 고효율 에너지 절감 등 친환경 기술에 스타일리시한 디자인까지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성공 뒤에는 트렌드 정보회사 ‘넬리로디(NellyRodi)’가 있었다. LG전자는 넬리로디의 컨설팅을 바탕으로 ‘친환경 라이프스타일과 디자인,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최상위 프리미엄 고객층을 겨냥한 마케팅’이라는 유럽시장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관찰과 열정’으로 최신 유행과 소비자 분석

    트렌드 분석이 기업의 이윤 창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면서 트렌드 분석을 담당하는 트렌드 워처(trend watcher)가 자연스레 주목받고 있다. 또한 시장 트렌드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로 끝나는 만큼 기업들 역시 트렌드에 민감해졌다.



    숙명여대 서용구 교수(경영학)는 “과거에는 시장에 대한 특별한 분석 없이도 기업 성장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분석적 접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면서 “어떤 트렌드를 찾아 성장 동력으로 삼을지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 LG생활건강 제품기획팀 이민지 대리는 “주위의 모든 것이 영감의 소재”라고 강조한다. 국내 패션 정보사, 해외 트렌드 정보 사이트, 국내외 잡지, 국내외 소비자들의 행동패턴 등을 볼 수 있는 개인 블로그 등은 그가 정보를 얻는 주요 소스다. “트렌드를 예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찰과 열정”이라는 그의 말처럼 퇴근길에서도 사람들의 패션과 행동패턴을 유심히 관찰하기 일쑤다.

    이 대리처럼 트렌드를 찾는 사람들을 트렌드 워처 혹은 트렌드 서퍼(trend surfer)라고 부른다. 광의(廣義)로는 ‘최신 유행과 소비자의 경향을 신속히 분석해 기업들에 그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미국에서는 트렌드 워처가 새로운 직업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기업과 각종 경제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트렌드 분석을 하는 트렌드 워처들이 늘고 있다.

    9월16일 서울 서초동 삼성생명빌딩 5층 회의실에서는 국내외 시장의 소비 트렌드를 분석하는 삼성경제연구소 마케팅전략실 직원들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연신 무언가를 찾고 실시간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테이블 정면에 위치한 거대한 보드판에는 지난 수십 년간의 거시적 트렌드의 흐름이 그려져 있고, 작은 이동식 보드판에는 날짜별로 완수해야 할 일정들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

    “최근에 들어온 자료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요.”

    “그래? 차근차근 설명해봐.”

    커진다 세진다, ‘트렌드 워처’ 파워

    광고대행사 웰콤의 이영실 마케팅연구소 커뮤니케이션 컨설팅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직원들에게 내년 트렌드 키워드를 설명하고 있다.

    즉각적인 의견 교환과 원활한 토론을 위해 칸막이가 쳐진 사무실보다 원탁 테이블의 임시 회의실이 주요 업무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지럽게 놓여 있는 각종 책과 자료들, 난상토론을 하는 모습은 트렌드를 분석하는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둥글게 배치된 자리에서 장난스럽게 종이를 던지며 격의 없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토론이 벌어질 때는 날카로운 비판이 오간다.

    트렌드 워처의 주요 임무는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최신 트렌드 흐름을 파악하는 것. 이를 위한 첫걸음은 자료 수집이다. “열심히 자료를 모은다”는 삼성경제연구소 이정호 수석연구원의 말처럼 정보통신의 발달로 정보의 생성과 소멸이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준비해야 할 자료도 방대하다. 좌담회, 집중인터뷰, 관찰, 온라인 조사, 대면 조사 등의 직접 조사와 국내외 관련 자료를 구매, 열람하는 데이터리서치를 함께 진행한다. 이때 신문, 잡지, 기관에서 작성하는 각종 통계도 훌륭한 자료가 된다. 방대한 정보량만큼 인터넷을 통한 자료 검색도 필수적이다. 기본적인 자료가 모아지면 문헌 비교분석을 한다. 즉, 기존에 나온 트렌드 분석 책들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트렌드 흐름에 대한 분석을 비교하는 것이다.

    # 지난 몇 달간 아모레퍼시픽 뷰티트렌드팀 정승은 과장이 본 잡지, 서적만 해도 수십 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정 과장은 아픈 눈을 뒤로한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포스트잇에 적기 시작했다. ‘윤리’ ‘페어(Fair)’ ‘참여’ ‘보호’…, 정 과장은 서로 연관 없을 것 같은 단어들과 수많은 사례들이 빼곡히 적힌 포스트잇들을 보드판에 붙였다. ‘공통된 것은 없을까?’ 정 과장은 수많은 포스트잇을 일말의 공통점을 가진 내용끼리 분류하기 시작했다. 분류 과정에서 팀원 간 의견 충돌도 다반사다. 서로 관련 없을 것 같던 사례들이 어느새 뷰티와 관련된 키워드로 정제됐다. 이런 분류작업을 몇 번 거친 끝에 마침내 환경친화적인 소비 트렌드를 나타내는 키워드 ‘PROUD BLUE ECO’가 도출됐다.

    자료를 다 모으면 흔히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 사람보다 다수의 사람 쪽에서 제기되는 아이디어가 많다’ ‘아이디어 수가 많을수록 질적으로 우수한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아이디어는 비판이 가해지지 않으면 많아진다’는 원칙하에 자유로운 발언과 생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이때 흔히 발생하는 문제가 트렌드 워처들이 가지는 직관과 정형화된 트렌드 분석 틀에서 나온 결과의 충돌이다. 둘 간의 괴리가 발생하면 사전(事前)적으로 트렌드 워처들은 토론을 통해 의견 조정을 해나간다.

    트렌드 워처들의 토론은 비단 위의 경우뿐 아니라 트렌드 워처들의 트렌드 분석 결과가 서로 다를 때도 이뤄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정을 하기보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공유한다. KTF 고객경험관리(CEM)팀 이문섭 과장은 “사회에 다양성이 존재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한쪽 의견만을 강조하기보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가 나는 원인을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사전적으로 조정이 안 될 경우 사후(事後)적으로 기업 트렌드 분석팀 팀장과 경제연구소 에디터들이 조정을 담당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동훈 수석연구원은 “개인 연구원들이 강하게 확신하는 경우 이를 존중하지만, 에디터에 해당하는 임원들이 연구소 정책 차원에서 조정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것 제시 압박 직업병도 생겨

    커진다 세진다, ‘트렌드 워처’ 파워

    기본자료가 모아지면 문헌 비교분석을 한다. 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내 모습.

    키워드로 정리된 트렌드 분석 결과가 나오면 이는 곧 신제품 개발에 반영된다. LG생활건강이 출시한 ‘오휘 파우더 선블록’의 경우 최근의 기후 변화와 소비자들의 화장패턴 변화라는 트렌드를 예측해 개발한 제품이다. 끈적거림이 없고, 언제 덧발라도 메이크업이 흐트러지지 않는 자외선 차단제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니즈(needs)를 파악해 이를 파우더 타입의 선블록 제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트렌드 워처들이 파악한 트렌드는 이처럼 여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제품 개발에 반영된다. 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트렌드 워처들의 가장 큰 고민은 미세한 트렌드 흐름의 변화를 신속히 포착하는 선구안(選球眼)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트렌드를 분석하면 장기적 흐름에서는 분명한 변화가 보이지만, 단기적 흐름에서는 그 변화가 미미한 경우가 많다.

    숙명여대 서 교수는 트렌드 파악의 신속성을 택시 승차에 비유했다.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해 택시에 타야 하는데, 주어진 자리는 네 석뿐이다. 다섯 번째로 트렌드를 제시하는 사람은 결국 택시를 타지 못한다. 네 번째 안에 들지 못한 다섯 번째 트렌드 분석은 이미 트렌드 분석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셈”이라며 “트렌드 워처들은 장기간에 걸쳐 미세한 변화를 보이는 트렌드를 누구보다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항상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놔야 한다는 압박감도 트렌드 워처들의 또 다른 고민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순화 수석연구원은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놔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이러다 보니 ‘직업병’도 생긴다. 프로패션정보네트워크(PFIN) 이현주 팀장은 “귀가 발달하는 것 같다”며 웃는다. “밥 먹으러 번잡한 식당에 가도 옆에서 새로운 뭔가를 얘기하면 귀를 쫑긋 세우기 때문에 실제로 귀가 커지는 듯하다”는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정 과장 역시 “자신들만이 부르는 ‘트렌드 병’을 갖고 있다”면서 “모든 것을 키워드에 맞춰 자동으로 분류하는 자신을 보고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또한 “트렌드 발표회 전에 수많은 잡지와 이미지를 모아 정리하는데 이때는 미용실에 가서 잡지를 봐도 키워드 분류가 저절로 될 정도”라고 한다.

    트렌드 워처라는 용어는 아직 대중에게 생소하다. 기업들 역시 트렌드 분석에 적극성을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개별적인 트렌드 분석팀을 두기보다 각 사업별로 해당 제품 트렌드를 분석하는 팀을 태스크포스(TF) 형식으로 두고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예를 들면 KTF의 경우 고객 성향 및 소비자 행태 분석을 위한 리서치 업무를 과거에는 마케팅연구실에서 수행했지만, 업무개편 및 조직보완 이후 지금은 CEM팀에서 일부 수행하고 있다. 그 대신 상품개발부서에서 요금기획팀, 제휴추진실, 비즈니스부문의 각 사업팀이 TF 형식으로 해당 상품에 대한 트렌드를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트렌드 워처들은 자신들의 등장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생소한 용어이긴 해도 이미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 ‘트렌드를 아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지식정보화 시대의 선봉장, 트렌드 워처. 이들의 파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위력을 발휘할 전망이다.

    인터뷰/세계적 트렌드 정보회사 ‘넬리로디’ 최고경영자 르루에

    “세계 각지 여행하며 공기 중 새 트렌드 포착”


    커진다 세진다, ‘트렌드 워처’ 파워
    트렌드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번 들어봤음직한 ‘넬리로디(NellyRodi)’는 라이프스타일, 소비자 태도, 인테리어, 패션 등과 관련된 트렌드북을 발간하는 세계 정상급 트렌드 정보회사다. 1985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립됐으며, 1990년 국내 에이전시가 설립됐다. 박미혜 국내 에이전시 사장은 “90년대 초반에는 패션업체들이 주요 클라이언트였으나 지금은 전자, 건설, 교육, 유통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확대됐다”고 말한다. 이 업체의 국내 주요 고객사는 삼성 LG 코오롱 한섬 등. 넬리로디 본사의 피에르 프랑수아 르루에 사장(사진)을 e메일로 인터뷰했다.

    - 트렌드 분석과 관련한 세계시장의 수요는?

    “기업들은 새로운 비즈니스 개발 기회를 찾기 위해 트렌드 분석을 활용한다. 업종 내 경쟁이 심화될수록 트렌드 예측의 수요도 높아진다. 특히 최근 경제위기와 관련된 각종 변수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점검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미래 트렌드를 찾고 있다.”

    - 트렌드 예측 방법은?

    “‘마케팅 스타일’이라는 트렌드 분석 툴을 개발하고 여기에 각종 마케팅 리서치 자료와 관찰된 소비자 행동 등을 대입한다. 또 공기 중에 떠다니는 새로운 트렌드들을 포착하기 위해 30명의 연구원이 세계 각지를 여행한다.”

    - 오늘날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 시대 트렌드세터들은 한 국가에 소속된 이들이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범지구적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누구라고 한계를 긋는 대신 ‘새로운 미학적 코드들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를 기꺼이 남들과 공유하려는 이들’로 정의한다.”

    - 넬리로디가 전망하는 2009년 트렌드 키워드를 하나만 소개한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성장(desirable development)’, 공정무역 등에 뚜렷한 신념을 가졌으며 유머러스하고 인간미 넘치는 도시인(ecolo urban dweller)이다. 이들의 소비 패턴은 다양한 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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