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1

2008.09.02

‘양날의 칼’ 대한민국 묵비권

현실적으로 가진 자들의 또 다른 특권 … 잘못 사용했다간 괘씸죄로 패가망신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8-08-25 13:0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현행 헌법 제12조 2항에 규정된 ‘묵비권’에 관한 내용이다. 이 권리는 검찰과 경찰 등 국가 권력기관의 강압적인 조사로 한 개인의 인격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술거부권으로도 불리는 이 묵비권이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배임혐의로 검찰에 체포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조사기간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8월12일 검찰청사로 끌려온 첫날 기자들에게 “나에게는 검찰에 오지 않을 힘이 없기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아예 공개적으로 권리 행사를 천명했다.

    검찰·법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해

    ‘양날의 칼’ 대한민국 묵비권

    배임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송두율 교수, 주가조작 및 횡령 혐의로 구속된 김경준 전 옵셔널벤처스 사장, 보복폭행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김승연 한화 회장 등은 검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다(왼쪽부터).

    정 전 사장의 변론을 맡은 송호창 변호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8월1일 이사회의 파행이나 한국방송공사에 공권력 투입, 사장 해임 조처, 다음날 체포 상황 등을 볼 때 이번 검찰 수사가 정 전 사장 개인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는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침해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그 점에 항의하기 위해 진술을 거부했다.”

    묵비권은 이처럼 검찰 수사에 대한 항의 표시나 피고인 또는 피의자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기 위해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국내 검찰이나 법원으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권리다. 그렇다면 묵비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묵비권은 17세기 영국의 한 판례에서 비롯됐다. 당시 영국에서 형사사건을 전담하던 ‘성법원(Star Chamber, 또는 성실청 법원, 1641년 폐지)’은 전횡을 일삼고 불공평하기로 유명했다. 형사사건 피의자였던 릴번(Lilburn)은 성법원의 불공평한 재판절차에 항의하기 위해 선서진술을 거부했다가 결국 처벌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영국 상하원은 성법원의 이 같은 처벌이 위법이라고 판단, 이를 파기했다. 이후 묵비권이라는 개념이 생겼으며,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인격권의 하나로 그 의미와 내용이 확대됐다.

    오늘날 묵비권은 단순히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불리를 떠나 피의자나 피고인이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일체의 권리를 말한다. 이 권리는 형사사건뿐 아니라 민사사건, 행정사건 등 국가기관이 관여된 모든 사건에 적용된다.

    다만 수사기법이 발달하면서 거짓말탐지기와 마취 또는 최면 분석 등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현재까지 거짓말탐지기는 진술보다 생리적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묵비권의 행사 대상이 아니라는 게 다수의 주장인 반면, 마취 또는 최면 분석은 묵비권이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묵비권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권리다. 묵비권을 행사하더라도 검찰의 양형구형이나 법원의 유·무죄 판단 및 형량 결정에 영향을 미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진 소환되면서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옵셔널벤처스 김경준 전 대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김씨의 변론을 맡았던 홍선식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김씨는 지난해 12월5일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직후부터 묵비권을 행사했다.

    “검찰이 김씨가 하지 않은 말도 했다고 주장하면서 양측이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검찰은 다른 혐의로 추가 기소하겠다고 했으며, 이에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게 홍 변호사의 얘기다. 이후 김씨는 올해 4월17일 1심 재판부의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검찰에서 진술을 거부했다.

    그 결과 검찰은 징역 15년에 벌금 300억원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내용 대부분을 받아들여 징역 10년에 벌금 150억원을 선고했다.

    홍 변호사는 “결과적으로 보면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했다가 완전히 패가망신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때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검찰이 권하는 대로 진술했으면 벌금 없이 징역 5년 정도의 구형만 받았을 것이다. 이건 검찰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라고 덧붙였다.

    “조사에 충실, 요령껏 대답이 효과적”

    김씨는 그나마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유력 변호사들이 변론도 맡았다. 그렇다면 일반 피의자들의 경우는 어떨까? 최강욱 변호사(법무법인 청맥)의 설명이다.

    “증거가 있는데도 묵비권을 행사했다면 법원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이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려고 추궁했을 때 묵비권을 행사했다면 법원이 사건을 주의 깊게 볼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흔치 않다. 법적으로 공익을 수호하는 검찰의 진술조사를 피의자가 거부했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한 것으로 인식되는 게 일반적이다.”

    최 변호사는 이어 “기본적으로 약자인 일반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긴 어렵다”면서 “검찰 조사과정에서 법률 외적인 압박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묵비권을 행사하려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최소한 변호인을 동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묵비권조차도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진 자들의 특권’”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서인겸 경희대 교수(법학·변호사)도 “일반 피의자에게 묵비권은 별 의미가 없다”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가 진술조서에 좋지 않은 이미지가 남을 수도 있으므로 가능한 한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설명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단, 사실관계가 분명한 상황에서 법원의 판단만 남은 사건의 경우에는 묵비권 행사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것 역시 일반인이 아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공인이나 여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경우에 한한다. 현재 정 전 사장 사건이 바로 이 범주에 해당한다. 이어지는 서 교수의 설명이다.

    “정 전 사장의 경우 배임혐의를 받고 있는데 이미 사실관계는 분명하게 다 나와 있다. 정 전 사장이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일 때 고의가 있었느냐가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의나 미필적 고의를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을 진술할 경우 자칫 검찰의 의도에 말려들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는 차라리 묵비권을 행사하고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헌법상 보장된 당연한 권리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소시민에게는 거리가 먼 묵비권. 그래도 굳이 행사하고 싶다면 “조사에 충실히 답변하면서 질문에 따라 요령껏 대답을 피하는 정도가 효과적일 것”이라는 게 한 변호사의 조심스러운 조언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