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7

2008.08.05

오래 사는 뚱보나라 ‘이상한 호주’

성인 26%가 비만인데도 세계 2위 장수국가 … ‘뚱뚱하면 오래 못 산다’ 의학계 주장과 반대

  • 시드니 = 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hanmail.net

    입력2008-07-29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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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사는 뚱보나라 ‘이상한 호주’

    ‘뚱보대국’의 불명예를 안은 호주에는 비만으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와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자주 일어난다.

    “뚱뚱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의학계의 주장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최근 호주에서는 비만과 수명에 관해 상반된 조사결과가 발표돼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멜버른의 ‘베이커 IDI 심장당뇨학회’가 “호주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뚱보나라가 됐다”는 연구결과를 연방정부에 보고한 지 일주일도 안 돼 “호주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장수국가가 됐다”는 ‘호주건강복지학회’의 조사결과가 공개된 것.

    매년 1만2000~1만7000명이 비만 인한 질환으로 숨져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인의 평균수명은 2008년 현재 출생하는 아기를 기준으로 81.4세인데 이를 성별로 나누면 남성 79세, 여성 84세다. 세계 1위 장수국가 일본의 평균수명인 82.2세에 비하면 10개월 차이가 난다. 그런데 호주인의 평균수명에는 원주민의 변수가 작용한다. 애보리진의 평균수명은 호주인 평균수명보다 17년 정도 짧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호주 국영 ABC방송은 “올림픽 역도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동시에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딴 것 같다”고 비유했다.

    한편 ‘호주의 장래에 비만 폭탄이 터질 것(Australia’s Future Fat Bomb)’이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연방정부에 제출한 사이먼 스튜어트 박사는 “성인 남녀 1만4000명을 대상으로 키와 몸무게를 조사한 결과 45~65세 남성의 70%, 여성 60%의 체질량지수가 25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호주는 머지않은 장래에 국민의료비 부담(비만 폭탄)이 엄청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아동 비만 실태다. 2007년 당시 래리 안토니 청소년 장관이 의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5~16세에 해당하는 연령그룹의 호주 어린이 25%가 비만에 시달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호주가 뚱보 챔피언 국가”라는 보도는 호주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화젯거리가 됐다. 호주가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메달 순위 4위를 기록한 스포츠 강국인 데다, 환경친화적인 생활습관으로 비만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국가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스튜어트 박사의 연구보고서에 담긴 호주의 비만 실태는 그런 고정관념과는 딴판이다. 성인의 26%에 해당하는 약 400만명이 비만으로 밝혀졌는데(미국은 25%), 이는 9년 전인 1999년의 4배에 이르는 수치다. 더욱이 비만 전 단계인 과체중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호주 성인 인구의 70% 가까운 900만명에 이른다.



    2007년까지의 통계를 분석한 호주 통계청(ABS)은 “매년 1만2000~1만7000명이 비만으로 인한 질환으로 사망하고, 이 가운데 비만이 직접 사인(死因)이 되는 경우만도 연 7000명, 하루로 계산하면 20명이 비만 관련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시드니대학 비만치료센터 이언 케터슨 소장은 “호주인이 평균 1kg씩 체중을 줄일 경우 각종 성인병의 치료에 드는 비용을 30% 줄일 수 있다”며 “정부 예산을 이용한 비만 치료는 소비가 아닌 투자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쯤 되자 정부 당국에서도 각종 체중감량 대책을 내놓고 있다. 헬스센터를 세우고 회비를 보조하거나, 어린이들에게 소량만 먹는 조기교육을 시키거나, TV 방송에서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식품 광고를 규제하는 것 등이다. 심지어 자녀들에게 운동을 시키는 부모에게 세금공제 혜택을 주자는 방안도 있다.

    호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태양과 맥주 그리고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형적인 아웃도어 피플(out door people)인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 호주인의 생활패턴은 운동을 하기보다 TV 스포츠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호주인의 비만은 도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호주 국영 ABC-TV에 출연한 조크 로리 농민협회 회장은 “전과 달리 호주 농민들도 도시인과 똑같은 처지가 됐다. 농가 기술이 기계화돼 손으로 하던 일을 트랙터가 다 해줘 운동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호주운송협회 스튜어트 글레어 수석부장은 “트럭 운전기사에게 시간을 정해서 트럭을 멈추고 간단한 운동을 하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현실은 의사를 만나는 것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호주에서는 여성>어린이>애완동물>남성 순으로 대접받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완동물 역시 비만 현상에서 비켜갈 수 없다. 뚱보가정의 애완동물도 뚱보라는 웃지 못할 조사결과가 나온 것이다. 심지어 ‘고양이 피트니스센터’가 생길 정도다.

    몇 년 전에는 한국 대만 중국 정부가 해외 비만 부부 가정에 자국 어린이들의 국제입양을 금지한 일이 있었다. “체질량지수(BMI) 30 이상 부부는 양부모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으며, 중국도 최근 BMI 40 이상의 부부에 대해 비슷한 제한규정을 도입했다. 그러자 호주 입양 지원 단체 및 의사들은 이러한 입양제한을 차별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BMI가 건강의 모든 지표는 아니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비만 예방 차원서 채식 위주 한국음식 인기

    ‘뚱보나라’ 호주에서는 뚱뚱한 국민들로 인해 벌어지는 웃지 못할 사태도 많다.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이 하기 어려운 직종이 간혹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이 그중 하나다. 집배원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가 과다 체중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구인난에 봉착한 우체국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도 환영하기로 했다. 우체국 직원 채용 몸무게 상한선을 올리고, 오토바이 제조사에 부탁해 체중 105kg의 거구도 오토바이를 탈 수 있게 기준을 바꾼 것이다.

    또 6월29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알코올이 여성 비만의 원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호주 여성들의 음주량이 남성과 같아졌다”며 “볼록 나온 맥주배로 유명한 호주 남성들처럼 와인 술잔 형태의 여성 허리곡선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존 티켈 박사는 이런 현상에 대해 “비만이 유전적 이유가 아닌 라이프스타일에 기인한 결과”라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남성과 똑같은 사회적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뚱보나라가 된 호주에서 갈수록 한국음식이 인기를 모으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비만 치료를 위한 식이요법으로 스시 등 일본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제 채식 위주의 메뉴를 다루는 한국식당에도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유난히 원유가격과 곡물가격이 급상승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을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의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다. 그래서일까, 월드비전의 호주지회장을 맡고 있는 피터 코스텔로 목사는 최근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나라들을 감안하면 비만에 대한 고민이 한가한 얘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이것은 이것대로 엄정한 현실”이라면서 “선진국들은 비만 대책과 더불어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나라에 대한 대책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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