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7

2008.05.27

‘방울토마토’의 신구 배우생활 40년 만에 첫 주연

연기에 묻어나는 삶의 관록

  • 입력2008-05-21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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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울토마토’의 신구 배우생활 40년 만에 첫 주연
    대학시절, 지금은 없어진 서울 광화문 시민회관 별관에서 ‘태’(오태석 원작·유덕형 연출)를 보았다. 그 무대는 연극 공연보다는 큰 행사를 주로 하던 극장이라 공연장으로서는 시설이 아주 안 좋았다. 당시 비싼 입장료 때문에 우리는 값이 가장 싼 학생표를 사서 들어갔는데 좌석이 3층 맨 꼭대기였다.

    배우들의 대사는 3층 꼭대기까지 잘 전달되지 않았다. 사육신 이야기를 다룬 것이어서 내용은 대략 알고 있었지만 어떤 배우의 대사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마이크를 쓰지도 않았고 배우들의 육성만으로 대사를 전달해야 했는데, 그 큰 시민회관 별관은 무대에서 3층 객석까지 너무나 멀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대사가 또렷이 들리는 배우가 있었다.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분한 그는 도중에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고문받는 장면도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서 하는 대사도 3층 꼭대기까지 분명히 들렸다. 그의 이름은 신구였다.

    1936년생, 올해 일흔두 살인 신구의 본명은 신순기다. 신구라는 이름은 그의 대학시절 은사인 동랑 유치진 선생이 지어준 예명이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배우 중에서는 이순재 다음으로 원로다. 경기고를 나온 신구는 연극을 하기 위해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1기로 들어간다. 1962년 연극 ‘소’로 데뷔한 신구는 1972년 ‘허생전’으로 탤런트 생활을 시작했다. 동랑레퍼토리 시스템에서 공연한 연극 ‘태’는 모교인 서울예대 유덕형 학장이 연출한 작품이었다. 당시 신구의 주 활동무대는 지금처럼 TV였다.

    연기파 배우 신구를,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게 만든 일등공신은 아이러니하게도 CF다. 그가 CF에 출연해 던진 대사 ‘너희가 게맛을 알아?’가 한때 대단한 유행어가 됐지만, 나는 그의 이런 연기가 우연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를 하는 메소드 배우다.



    신구가 영화에 자주 출연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다. 이문열 원작,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년)에서 그는 엄석대가 지배하는 5학년 담임교사 역을 맡았다.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며 한국 멜로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1997년)에서는 정원 역을 맡은 한석규의 아버지로 나왔다. 사진관을 운영하다 알게 된 심은하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불치병으로 죽어가던 한석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아버지가 잘 쓸 수 있게 리모컨 작동법을 알려준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신구는 아들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간 큰 가족’(2005년)에서는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 아버지 역을 맡았다.

    64년 나이차의 아역배우 김향기와 호흡 척척

    배우 신구를 사랑하는 젊은 감독들은 많다. ‘박수 칠 때 떠나라’의 장진 감독,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도 신구를 자신의 영화에 캐스팅했다. 언뜻 보면 신구의 연기는 평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전후좌우로 잘 계산된 그의 연기는 주변과 정확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평범한 것처럼 보인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신구의 최근 출연작 ‘방울토마토’(2008년)는 철거 직전의 판자촌을 무대로 한 휴먼 드라마다. 신구는 폐휴지를 모으며 여섯 살 난 손녀(김향기 분)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로 나온다. 손녀는 집 나간 엄마와 행방불명된 아빠 때문에 할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어린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숙하고 영악하다.

    “처음엔 향기가 너무 어리고, 나와 두 사람이 대부분을 끌고 가는 영화인데 이를 소화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향기는 나이는 어리지만 요구하는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연기한다. 참 신통하고 재능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울토마토’에서 할아버지 박구 역의 신구와 손녀 다성 역의 김향기는 무려 64년이란 나이차가 난다. 2000년생인 김향기는 두 살 때부터 광고모델을 시작했다. ‘마음이…’에서 오빠 역의 유승호와 함께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면서 충무로 아역배우 캐스팅 0순위로 올라섰다. SBS 드라마 ‘소금인형’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방울토마토’의 신구 배우생활 40년 만에 첫 주연

    1962년 데뷔한 신구는 현역배우 중 이순재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대중과 감독들에게 신구는 나이를 초월한 연기,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촬영하면서 할아버지가 참 많이 챙겨주셨어요. 추운 날 촬영했는데 따뜻하게 이불도 덮어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잘해주셨어요.”

    극중에서 신구는 가진 것 하나 없는 판자촌 할아버지 역을 맡아, 고집스럽고 무엇에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삶을 살아간다. 부모 없이 자라는 손녀 다성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른 할아버지 역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신구는 지금까지 숱한 작품에서 조연을 해왔다.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방울토마토’가 처음이다.

    “연기생활 40년 만에 처음으로 주연이란 것도 해본다.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내 모든 걸 연기에 몰입하고 싶다.”

    판자촌에서 폐휴지를 모으며 손녀와 어렵게 살아가던 박구는, 감옥에서 출감한 자신의 아들이며 손녀의 아버지인 춘삼(김영호 분)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빼앗긴다. 생계 수단이던 리어카도 철거하려는 철거반들과 이를 제지하려는 주민들의 다툼 사이에서 망가져버린다.

    어떻게든 부서진 리어카를 보상받기 위해 박구는 다성과 함께 철거의 시발점인 개발업자 갑수의 집으로 쳐들어가지만, 마침 갑수의 가족은 해외여행을 가고 없었다. 집에 남아 있는 것은 갑수 내외가 끔찍하게 아끼는 개 한 마리와 관리인 동훈(최동균 분)뿐이다. 박구와 다성은 그 집으로 몰래 숨어 들어간다.

    상반기 개봉 예정인 ‘모던 보이’에도 출연

    관리인 동훈은 주인인 갑수에 대한 인격적 복수의 수단으로 갑수가 애지중지하는 개를 서서히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개밥으로 주는 갈비에 진드기 농약을 타기 시작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박구는 고기를 좋아하는 손녀 다성에게 그 갈비를 몰래 훔쳐서 먹인다.

    신구는 2008년에도 활발하게 스크린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먼저 1937년의 경성을 무대로 한 김혜수 박해일 주연, 정지우 감독의 ‘모던 보이’가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또 이정표 감독의 ‘쩐의 전쟁 오리지널’에서는 독고철 역을 맡았다. TV 드라마와는 조금 다른 시나리오로 색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신구는 TV에서 맡은 배역을 그대로 맡았다. 박정철과 조여정이 각각 금나라와 최지인으로 출연한다.

    그는 걷는 것으로 건강을 관리한다. 집 근처에 있는 양재천을 따라 4km를 걷다가 되돌아온다. 한 번 걸을 때마다 8km를 걷는 셈이다. 무리하면 좋지 않다고 해서 격일로 걷는다. 따뜻한 할아버지의 이미지지만 무서울 만큼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배우 신구. 잘 계산된 그의 연기는 항상 작품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정확하고 깊이가 있다. 그래서 그는 오래가는 배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스승인 극작가 유치진이 예명을 오랠 구(久)로 지어준 것도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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