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1

2008.04.15

‘세대 간 대결’로 영국 정치 꽃핀다

원로와 신인들 정책 현안 불꽃 튀는 토론… 정계은퇴 정치인에 국민 신뢰와 존경

  • 코벤트리 = 성기영 통신원 sung.giyoung@gmail.com

    입력2008-04-07 1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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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 간 대결’로 영국 정치 꽃핀다

    켄 리빙스턴 시장의 대항마로 나선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 후보. 44세인 그는 언론인 출신으로 7년의 정치경력을 지닌 신예다.

    세대 간의 대결은 나라를 막론하고 선거를 관전하는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다. 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의회정치 선진국인 영국에서도 ‘관록’을 내세우는 원로 정치인과 ‘패기’로 무장한 신인의 대결은 정치사의 주요 장면을 장식해왔다.

    현직 총리인 고든 브라운 노동당수는 1951년생, 올해로 57세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보수당 지도자 데이비드 캐머런은 1966년생으로 마흔을 갓 넘긴 신인에 불과하다. 머리가 허연 50대 총리와 아직 피부가 팽팽한 40대 초반의 보수당수는 매주 수요일 의회에서 불꽃 튀는 입씨름을 벌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총리를 상대로 벌이는 대정부 질문은 독설과 힐난, 야유와 풍자가 난무하는 열기로 가득 찬다. 야당 지도자들은 때론 손가락질을 하고 때론 책상을 치면서 정책의 맹점을 추궁한다. 그 공격의 최일선에 총리보다 열다섯 살 아래인 데이비드 캐머런이 있다.

    5월 영국 정치사에서 또 한 번의 볼만한 세대 간 격돌이 예정돼 있다. 3선에 도전하는 노동당 소속 런던시장 켄 리빙스턴과 보수당이 이에 맞서 내세운 ‘히든카드’ 보리스 존슨의 맞대결이 그것이다. 리빙스턴 시장은 올해 63세, 반면 존슨 후보는 44세에 불과하다. 2012년 올림픽 개최지인 런던의 시장 자리를 놓고 20년을 뛰어넘는 세대 간 대결이 펼쳐지는 것이다.

    런던시장 놓고 20년 뛰어넘는 세대 간 대결



    리빙스턴 시장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붉은 켄(Red Ken)’, ‘레닌스파트(Leninspart)’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런던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혼잡통행료 강제 징수 등 정부 주도형 정책들을 강력히 추진한 덕택에 얻은 별명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이 적지 않은 효과를 발휘해 유권자들의 지지는 탄탄한 편이다.

    리빙스턴 시장의 철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수당이 고심 끝에 내세운 존슨 후보는 보수 성향의 잡지 ‘스펙테이터’ 편집장 출신이다. 현실 정치에 입문한 것은 겨우 7년 전으로 리빙스턴 시장의 화려한 경력과 비교하면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언론인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직설적 언변과 잦은 돌출행동 등이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면서 대중적 인기가 급상승했다. 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로 돌출 발언을 일삼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두고 언론에서는 ‘자루걸레’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나 그에 반비례해 대중적 인기도 덩달아 올라가 결국 리빙스턴 시장의 대항마로까지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밖에도 영국 의회정치에서 40대 정치인들이 활약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고든 브라운 총리의 조각(組閣) 당시로 돌아가보자. 이라크 및 아프간 정책을 진두지휘하는 외무장관 자리에 당시 41세의 데이비드 밀리번드 의원이 임명됐다. 또 이 당시 브라운 내각에는 갓 40세가 된 루스 켈리(여) 교통부 장관과 37세의 제임스 퍼넬 문화체육부 장관도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최근의 영국 정치에서 젊은 신예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향은 10여 년 전 43세의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의 기수를 자처하며 당내 권력투쟁 전면에 나설 때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국 정치가 원로 정치인들을 퇴물 취급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사부를 홀대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총선이나 전당대회 등 주요 정치행사가 열릴 때마다 영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은퇴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흑백 필름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200년이나 되는 양당제 의회정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회고와 칭송은 정치뉴스의 단골 메뉴다. 토니 블레어가 41세 나이로 노동당수가 되어 ‘제3의 길’을 부르짖던 장면이나 그의 정적이었던 고든 브라운 의원이 TV 토론에서 열변을 토하는 10여 년 전 필름은 아직까지도 영국 정치의 아이콘처럼 비쳐지곤 한다.

    국민에게 신망받는 원로 정치인들이 70~80세까지 현역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십 년에 걸친 유혈분쟁에 종지부를 찍고 지난해 공동정부를 출범시킨 북아일랜드의 정치수반이었던 이언 페이슬리. 아일랜드 평화협상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올해 5월 현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페이슬리는 신페인당의 제리 애덤스와 함께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북아일랜드 신교도 세력을 대표하는 민주연합당(DUP) 당수직을 40년 동안이나 수행해왔다. 은퇴를 선언한 이언 페이슬리의 올해 나이는 82세다.

    여의도 정치인 퇴물 취급 한국 현실과 극명한 대조

    이뿐만이 아니다. 노동당 내 좌파 블록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토니 벤은 2001년 정계를 은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그러나 벤 의원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정치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해 의사당을 떠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이러한 약속을 지켰다. 1970~80년대 내내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 입안을 주도했던 벤 의원은 의사당을 떠난 뒤에도 이라크전 반대 캠페인 등을 통해 블레어 총리의 우파적 정책을 공격하는 일선에 섰다. 따라서 그의 정계은퇴 선언은 ‘국회의원’에서 ‘거리의 정치인’으로 활동무대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계를 떠난 지금도 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지난해 BBC에 의해 벤 의원이 마가렛 대처 전 총리를 제치고 ‘우리 시대의 정치 영웅’으로 선정된 것만 봐도 영국인들이 원로 정치인들에 대해 어떤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영국의 원로 정치인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국민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는 의원내각제 전통에 따라 깊이 뿌리내린 직업 정치인 시스템과 맞닿아 있다. 영국의 내각 명단에서는 국방부 장관에서 내무부 장관으로 옮겨가거나, 심지어 환경부 장관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블레어 총리 시절 마지막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대(對)테러 입법을 주도한 존 리드 의원이 전자의 경우이며, 현 브라운 내각에서 40대 초반 외무부 장관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데이비드 밀리번드 의원이 후자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오랜 의원내각제 전통을 통해 어디에 갖다놓아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직업정치인군’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 10여 년간 ‘여의도 정치인’이 퇴물 취급을 당하고 검증되지 않은 신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한국정치 현실에서 보면 상당한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언뜻 보면 고리타분해 보이는 영국 정치는 노장청(老壯靑)의 조화가 왜 중요한지, 이를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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