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0

2008.04.08

“패거리 정치에 닭 쫓던 개 신세”

“25년 버티다 역귀향, 이제는 관전자”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8-04-02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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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거리 정치에 닭 쫓던 개 신세”

    <b>공천섭</b><br>· 1948년생<br>· 전 쌍방울 대표<br>· 전 한나라당 전북도지구당 위원장

    인터뷰 내내 그의 전화기는 몸살을 앓았다. “아, 의원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번에는 다르다니까요.”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아, 됐어요!”라고 신음하듯 짧게 대답했다. 3월25일, 18대 총선 후보자 등록일 첫날. 그는 서울의 한 지하커피숍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출마를 원하는 고향 지지자들의 등쌀을 피해 서울로 일종의 ‘정치적 망명’을 온 것이다. 세상에 이런 정치인도 있을까.

    한 달 전 그는 고심 끝에 서울 중랑갑 지역구에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다. 25년 된 정치적 고향(전북 익산)을 떠나 출생지(중랑구)로의 역귀향을 시도한 것이다. 양 지역의 반발은 예상대로였다. 그럼에도 고만고만한 경쟁자들 덕에 ‘혹시나’ 하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인지도 올리기에 총력을 기울인 것도 잠시, 아나운서 출신 ‘유정현’이란 젊은이가 전략공천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다. 그러자 이제는 옛 지지자들의 ‘무소속’ 출마 요청 전화가 쇄도한 것이다.

    “절대 못 나가죠. (호남에서) 나가면 떨어질 걸 뻔히 아는데….”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그리고 한나라당까지…. 단 한 번의 철새 행보 없이 외길만을 달려온 그의 정치이력은 이제 20년을 훌쩍 넘어섰다. 30대의 야심만만하던 정치인이 어느새 환갑을 맞은 것이다. 공천섭(60) 전 한나라당 전북도지구당 위원장 이야기다. 올해는 총선 도전자가 아닌 관전자가 되려 한다.

    “너무 순진했던 거죠. 진작 상경했다면 3선 이상은 했을 텐데….”



    고향 지지자들 등쌀 피해 서울로 ‘정치적 망명’

    그의 불행은 지역구도가 영호남으로 확연하게 갈리던 1988년 13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북지역 기업의 대명사이던 ㈜쌍방울의 사위인 그는 ‘기업인=여당’이란 공식에 따라 민정당 소속으로 정가에 데뷔했다. 서울에서의 화려한 인맥과 든든한 재력, 그리고 뛰어난 언변과 친화력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기에 그는 순식간에 거물급 신인으로 주목받았다. 물론 당시 전국구(비례대표) 제안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이왕이면 ‘끗발 좋은’ 지역구 의원에 욕심이 났다(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당시 전국구로 데뷔했다).

    “돈 주고 사는 국회의원이라면 몇 번이라도 했겠죠. 그런데 남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군요.”

    지나치게 자신감에 넘쳤던 걸까. 1988년 급변하는 정치지형은 그에게 호락호락 금배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동안 지속된 중선거구제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데다 평민당 돌풍으로 민정당 소속은 호남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악전고투 속에 획득한 3만 표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후 야당 텃밭에서 여당 소속으로 당선되기 위한 노력을 줄기차게 기울였다.

    “1990년을 전후해 4년간 3000건 이상의 주례를 섰다니까요. 주말엔 주례 서느라 제 밥도 못 챙겨 먹을 정도였어요. 그 덕에 현역의원 얼굴은 몰라도 익산에서 제 얼굴 모르는 사람은 없죠.”

    ㈜쌍방울 사장이라는 배경을 기반으로 전북탁구협회 회장, 대한컬링연맹 회장, 경희대 총동문회 부회장, 97동계유니버시아드 추진본부장,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까지 지내며 그의 정치생활은 끊임없이 외연을 확대해갔다. 두 권의 저서를 내고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따면서 경쟁력도 높였다. 그때만 해도 여당은 호남에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기 위해 형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시절이다.

    14대 총선 때는 민자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득표수는 첫 도전 때보다도 줄었다. 경쟁자에게 한참 뒤진 30%대의 지지율. 호남에서의 여당 지지율이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던 시절 그의 선전(善戰)은 호남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지만 그래도 낙선은 낙선이었다. 한때는 그도 당선을 위해 야당으로 돌변할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기업인 출신’이라는 족쇄가 정치권 입성을 노리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15대 총선(1996년)은 기업경영이 어려워져 출마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런데 제 허락도 없이 청와대가 알아서 공천을 하더군요.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하니까 위에서는 ‘세무조사 나오겠다’며 반쯤 협박조로 나왔어요. 그 정도로 험악한 시절이었죠.”

    그래도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이후 여야가 지역감정으로 인한 ‘싹쓸이 문제’ 해결을 위해 중선거구제도와 ‘석패율(惜敗率)’ 제도 도입을 위한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지역구 선거에서 낙선했더라도 득표율이 가장 높은 후보를 비례대표 방식으로 구제하는 방식을 말한다. 한 번만 더 고생하면 국회 입성의 기회가 열릴 것도 같았다.

    “1999년 허주 김윤환 씨, 2004년 박근혜 씨도 (석패율 제도) 도입을 약속했는데, 결국은 영남지역주의 때문에 도입하지 않더군요.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거죠.”

    영호남의 대립은 날로 극심해졌지만 중앙당 차원에서 호남에 대한 배려가 없자 16대 총선(2000년)을 앞두고 그는 탈당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17대 총선(2004년)에서는 지역구를 포기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비례대표에 줄을 서기도 했다. 공천이 유력시됐지만 막판에 한국노총 출신 배일도 씨(전북)에게 밀리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이게 20년 정당생활을 해온 사람에 대한 예의인가요? 이건 정당이 아니라 패거리 정치에 불과해요. 원칙도 배려도 정의도 없는….”

    그는 이번 총선의 비례대표 공천에서도 한나라당 전북도지구당 위원장이 38번 말석에 배치된 것을 놓고 분통을 터뜨렸다. 말로만 호남 배려지 실제로는 ‘영남당’에 불과하다는 한탄이었다. 그렇다면 진작 영남당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왜 말을 갈아타지 못했을까.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죠. ‘오지’에서 보란 듯 당선돼 멋지게 정치인으로 살아서 돌아오고 싶었거든요. 진짜, 국회의원 빼고는 못해본 게 없는 사람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한때는 재벌 소리를 듣던 그의 재산은 어찌 됐을까?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그의 재산신고 명세는 96억원. 당시 1위이던 정몽준 의원은 700억원대 재산을 신고했다. 실제로 돈 때문에 그를 찾는 지지자들도 적지 않았던 시절이다.

    기업인 출신 족쇄 정치권 입성 발목 잡아

    “절대로 선거에 돈을 많이 쓴 건 아니에요. 아무리 브로커들이 덤벼도 재산이 축날 정도는 아니었어요. 문제는 부자 후보를 대하는 사람들의 편견이죠.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으니까요.”

    그는 정치에 몰입하는 와중에 외환위기로 모기업 ㈜쌍방울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시련을 겪었다. 정부 권유로 전북 무주의 동계 체육시설에 과도하게 투자한 게 화근이었다. 그는 이를 중국 현지 투자로 극복했다지만, 재벌 소리를 듣던 그에게 정치라는 그늘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기업인으로 남부럽지 않은 시절을 보냈지만 여전히 아쉬워요. 한 번만 해봤더라면 지금은 달라졌을 텐데 말이죠.”

    그는 다시는 호남지역으로 내려가 한나라당 소속으로 정치를 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그런 그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점은 아직도 고향 사람들이 그를 ‘의원님’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의원생활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는 또한 지금까지 뒷바라지해준 가족들을 떠올리며 시커멓게 탄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허주가 그리워요. 오늘날 정치인들은 화해와 설득의 기술이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그 구실을 하고 싶었는데….”

    그는 이렇게 한나라당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 속에서 18대 총선 후보자 등록 마감일을 버티고 있었다. 4년 뒤 그의 이름을 다시 공천 신청자 명단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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