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8

2008.03.25

알렉산더는 영웅인가, 파괴자인가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8-03-19 14: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알렉산더는 영웅인가, 파괴자인가

    2004년 개봉된 영화 ‘알렉산더’에서 알렉산더 대왕 역으로 출연한 콜린 패럴. 알렉산더는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영토를 점령한 정복자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한 사람의 동상 앞에서 그가 이미 전 세계를 정복했던 나이에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자조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감하게 살다가 자신의 명성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고 죽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한 그는,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땅으로 여겼던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더는 정복할 땅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탄하며 흐느껴 울기도 했다. 역사는 그를 세계의 정복자, 동서양 문명을 처음으로 만나게 한 영웅으로 기록한다.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그리스 문명을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전파한 알렉산더(B.C. 356~B.C. 323)가 바로 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일리아드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를 유독 좋아해 세계 정복의 꿈 외에도 전 세계 문화를 그리스처럼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다.

    아버지 필립포스 왕이 페르시아 정벌 계획을 이루지 못한 채 부하에게 암살당하자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는 귀족세력을 약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화폐개혁을 통해 상공업을 장려한 개혁군주였다. 그는 또 상비군을 창설하고 무적의 ‘마케도니아 방진(중무장한 보병의 양 날개에 경보병, 선봉과 후미에 기병을 배치한 진)’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유명한 정복자 vs 난폭했던 청년 ‘엇갈린 평가’

    기원전 333년, 마침내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크게 이기고 페르시아의 근거지인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한 뒤 이집트에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인구 50만명이 넘는 상업항인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학문과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 만큼 번영을 누렸다. 이후 그는 이란고원, 인도의 인더스강까지 정복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갖게 됐다. 그러나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열병에 걸렸고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군대를 돌려 페르세폴리스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귀로(歸路)는 매우 참담했다. 식량과 식수가 모자라 고통이 막심했다.



    기원전 323년 바빌론으로 돌아와 아라비아-카르타고-로마 원정을 준비하던 알렉산더는 33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후계자도 정해놓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심각한 왕권쟁탈전이 벌어지고 모친과 아내, 딸은 모두 반대파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대제국 영토는 장군들에 의해 마케도니아, 이집트 등 세 나라로 찢어지고 만다.

    하지만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헬레니즘사’에서 헬레니즘(Hellenism)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알렉산더는 서방의 그리스와 동방의 오리엔트를 사상 최초로 접속시킨 동서교류사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아름다운 그리스식 조각상과 건축물이 동양에 건설되고, 동양의 천문학과 수학이 서양에 전파된 것도 그에게서 비롯됐다. 특히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알렉산더는 그 자신부터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로크사네와 결혼하며 마케도니아인과 동양 여성의 결혼을 장려했다. 서양인이 동양인과 혼인하면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헬레니즘은 이렇듯 동쪽과 서쪽이 최초로 만난 세계적인 문화였다. 그리스인은 더는 이민족을 야만시하지 않게 됐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이 탄생했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아르키메데스는 부력(浮力)의 원리를 알아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디오게네스의 견유철학, 스토아·에피쿠로스 철학,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등이 모두 알렉산더가 일으킨 헬레니즘 문화의 상징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만이 (헬레니즘의) 영웅일까.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 국왕·황제 중심 역사에서 탈피해 평범한 사람들과 소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시선으로 세계사를 집필한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일빛)은 알렉산더가 ‘진정한 영웅’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몇 싸움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위대한 장군이자 유명한 정복자였지만, 그는 자신을 신이라 간주했고 일시적인 격분과 변덕으로 친구를 죽였으며 허영과 자만심이 가득하고, 도시를 깡그리 파괴해버릴 만큼 잔인하고 난폭하며 교만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우선 알렉산더의 업적 대부분은 부왕 필립포스가 일찍이 치밀하게 국사를 운영했기에 가능했다. 알렉산더는 반항하는 테베 시민을 학살하고 몇만의 시민을 노예로 삼는 야만의 공포정치로 그리스를 통치했다. 또한 알렉산더는 자신의 제국에 도로조차 남기지 않았고, 더는 정복할 땅이 없다고 한탄했다지만 인도의 서북부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인도 전체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대국이었던 중국은 구경도 못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 327년의 일이었다. 그의 침략은 일종의 기습과 같아 인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와 인도 간 교섭사의 문을 열어줬다고 하지만 네루는 “알렉산더 시대 이전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가 있었으며, 인도는 페르시아는 물론 그리스와도 계속 왕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알렉산더의 인도 정복 …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네루와 브레히트의 시가 갖는 역사관은 일맥상통한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서는 시민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과연 ‘어떤 책 읽는 노동자가 역사에 갖는 의문’의 답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퐁트넬(1657~1757)이 쓴 ‘죽은 자들의 새로운 대화’에 나오는 그리스인 매춘부 리네가 알렉산더에게 한 말이 그 답일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아시아, 페르시아, 인도. 이 모든 것을 정복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명성에 당신 몫이 아닌 것을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병사들, 장군들 그리고 심지어 우연들의 몫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