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8

2008.03.25

공공장소 에티켓 실종 사건

  • 입력2008-03-19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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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장소 에티켓 실종 사건
    “아니, 이제 일어났으면 일어났지 당신은 전기밥솥에 지어놓은 밥도 혼자 못 퍼먹어요? 뭐라고요? 언제 지어놓은 밥이냐고요? 내 참 기가 막혀서,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바쁜 사람한테 전화 걸어요. 내가 지금 놀러 나온 줄 알아요. 밥이 오래돼서 딱딱하게 굳었으면 굳었지, 그게 왜 내 탓이야. …이제 자장면은 진저리 난다고? 거봐, 자장면 진저리 나게 먹는 동안 아까운 밥이 굳어버린 거잖아요.”

    박완서의 소설 ‘그래도 해피엔드’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중년여성이 휴대전화로 남편과 말다툼하는 장면이다. 한국의 공공장소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늘어놓는 잔소리, 애인끼리 투정하며 벌이는 사랑싸움, 친구와 하는 다른 친구에 대한 험담 등 온갖 사적인 대화가 타인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 높여 흥분하는 바람에 애꿎은 주위 사람들이 민망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화기를 붙들면 우리는 자기만의 골방에 들어온 듯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전화는 애초 공용매체로 출현했다. 1902년 한성과 인천을 잇는 공무용 전화가 개설되고, 1908년엔 ‘전화국 창구통화제도’가 시행되면서 일반인이 직접 전화국에 가서 전화를 걸 수 있게 됐다. ‘공중전화’란 말은 이때 등장했다. 그러다 1930년 서울 시내에 ‘공중전화소’가 생겼고 1954년 국내 최초의 ‘흑색 탁상용 공중전화기’가 등장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옥외 공중전화는 1962년이 돼서야 첫선을 보였고 그 뒤 꾸준히 발전해왔다.

    공중전화는 타인과 공공에 대해 배려할 줄 아는 매너를 요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뒤에 줄 선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은 탓인지 1972년 체신부는 공중전화의 통화시간을 3분으로 제한하고 타이머를 설치해 3분이 경과하면 자동적으로 단절시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제한이 풀렸고, 시민들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자율적인 전화 문화를 만들어가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사고가 나기도 했다. 1990년 여름, 서울의 어느 공중전화 부스에서 너무 오래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청년에게 뒤에서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했다. 다른 일로 잔뜩 화가 나 있던 탓이었을까. 청년은 아주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시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시설을 개인 전유물인 양 독점하고 타인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심보가 극에 달해 그런 참극을 빚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공중전화의 퇴조와 함께 아예 ‘공중’도 사라지는가. 휴대전화 보급과 함께 공공장소는 공공매너가 없는 개인들에 의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특히 대중교통시설 속에서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큰 소리로 통화한다. 자기가 그럴 때는 아무렇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처지가 바뀌면 무척 짜증난다. 때론 폭력적인 충돌도 일어난다. 지난해 여름 경남 양산의 어느 병원 대기실에서는 50대 남자가 옆에 있는 고등학생이 너무 큰 소리로 휴대전화 통화를 한다며 흉기를 휘둘러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됐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람들은 소리에 둔감해졌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처럼 언성을 높이는 게 오히려 권력이 되기도 한다. 고성방가하는 취객도 별로 제재를 받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거나 포교를 하는 이들에 대해 승객들은 대단히 너그럽다.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구호와 노랫소리로 굉음을 내지만 행인들은 종종걸음으로 지나칠 뿐이다. 상점가의 가게들도 제각기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대며 호객을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타인 배려 없이 목청껏 통화 … 성숙한 시민문화 절실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 목소리에 관대한 것도 이러한 ‘소리 불감증’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지 모른다. 또 자기와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해 별생각이 없기에 남들이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사적인 대화를 큰 소리로 나눈다. 한국에서 휴대전화가 급속도로 보급된 것도 그러한 문화에 편승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라 같으면 감히 밖에서 통화할 수 없을 내용을 고속전철 안에서조차 태연하게 큰 소리로 통화할 수 있기에 그만큼 휴대전화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실제 한국의 휴대전화 통화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화를 할 때는 대화할 때보다 목소리가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눈빛이나 제스처 같은 보조신호가 있다. 그에 비해 전화통화에서는 오로지 음성정보 안에 모든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목청이 높아진다. 가느다란 볼륨으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주파수를 맞추느라 주변 상황엔 신경 쓰지 못하게 된다.

    청각신호는 영상신호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보기 싫은 것은 눈을 감으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것은 귀꺼풀이 없으니 차단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특별한 에티켓을 요구한다. 그것을 가리키는 ‘셀리켓’(celliquette, cell phone과 etiquette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도시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폐를 끼치지 않고 편안하게 어울릴 수 있는 윤리를 요구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휴대전화 개발 기술과 디자인 실력을 갖춘 한국, 이제 그것을 사용하는 시민문화를 디자인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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