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5

2008.03.04

청소년들 손안에 ‘또 다른 나’ 있다

  • 입력2008-02-27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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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들 손안에 ‘또 다른 나’ 있다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 딱딱한 수업 분위기를 풀어보려 교수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했다.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아 강의실은 더 썰렁해지고 말았다. 그때 한 학생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는 흐뭇해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 학생은 책상 밑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얼른 빼앗아 화면을 봤다. 거기엔 그 강의실의 다른 수강생이 보낸 문자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야, 되게 썰렁하지 않니?”

    무선통신은 젊은이들에게 드넓은 대화공간을 열어주었다. 미디어는 점점 어린 세대와 친화력을 갖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신문과 책은 어린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매체다. 라디오 시대가 열리면서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들도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고, TV의 등장으로 말 못하는 유아들까지 수용자가 됐다. 전화를 보더라도 유선전화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의 기기였다. 아이들은 자기에게 전화가 와도 길게 통화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무선전화기가 나오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아이들은 수화기를 들고 자기 방에 들어가 길게 통화할 수 있게 됐다.

    휴대전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 밀착도는 훨씬 높아졌다. 청소년들은 그 기기를 어른들보다도 훨씬 능숙하게 다루면서 통신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Phone · Fun’이라는 광고 슬로건대로 젊은이들에게 전화는 놀이세계를 만들어주는 소중한 매체다. 그것을 통해 그들만의 배타적인 통신세계를 구축한다.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사이버 공간이 거기에 열린다.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물 받고 싶어하는 물건은 장난감이 아니라 휴대전화나 MP3 같은 것이라고 한다. 완구업체의 타격이 적지 않으리라.

    휴대전화는 꼭 지녀야 마음 편한 분신 같은 존재

    그러나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휴대전화는 환영받지 못한다. 수업에 방해되기 때문에 소지를 금하는 학교도 있다. 그런 규제에도 아이들은 몰래 가지고 다닌다. 어떤 학생은 액정화면을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책상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교사가 학우를 구타하는 장면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리고, 즉석에서 경찰에 신고한 학생도 있다.



    가정에서도 갈등이 적지 않다. 밤늦게 전화에 매달리는 자녀에게 부모들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통화료가 너무 많이 나와 당황하는 일도 잦다. 300만원이 넘는 요금이 청구되자 부담감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청소년도 있었다. 건당 요금이 엄청나게 비싸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휴대전화 상품들도 중요한 원인이다.

    그런데도 휴대전화를 없애지 못하는 까닭은 부모의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은 학원 때문에 늦게 다니지만 다른 일로 외출할 때도 귀가가 늦다. 하지만 부모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언제든 휴대전화로 상황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휴대전화를 쉽게 갖게 된 데는 그러한 원격관리(remote mothering)의 필요도 한몫했다. 그러한 간섭에서 한 꺼풀 벗어나는 청년기에 이르면 귀가시간이 훨씬 늦어진다. 예전엔 집에 와야만 자기에게 걸려온 전화 메모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 구속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물론 휴대전화는 가족의 소통을 증진해주기도 한다. 집에 함께 있지 않아도 수시로 안부를 묻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무뚝뚝한 남자들이 문자메시지로 아내나 자녀들에게 감사나 사과의 뜻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대 간의 소통 면에서 보면 휴대전화로 단절이 깊어지는 경향이 더 짙다. 그것은 휴대전화에 등록된 메모리 다이얼의 세대 분포로 금방 확인된다. 10대의 경우 거의 동갑내기들에게 집중되고, 20대도 아래위로 서너 살의 알음알이가 대부분이다. 가족 이외에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거의 맺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는 여러 세대가 공존하는 삶의 마당이다. 젊은이들이 직장에 들어가면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과 소통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공공의 장(場)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데 취약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휴대전화로 또래들과 나누는 사적인 이야기에만 탐닉한다면 ‘사회지능’의 결함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애용하는 각종 은어나 줄임말들은 배타적인 의미세계에서 또래 간 결속을 다져주지만, 한편으론 외부세계와의 장벽을 점점 두껍게 하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휴대전화를 ‘또 다른 나’라고 표현한다. 자아가 투영되는 분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통화를 하지 않을 때도 그 안에 수록된 인간관계에 안온하게 머무는 듯하다. 그런데 그러한 정보행동이 익숙한 친구들끼리만 소통하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으로 퇴행하지는 않는지. 낯가림하는 유아들처럼 자꾸만 안으로 웅크려드는 건 아닌지.

    가끔은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로움도 헤아려보자. 세대 사이의 ‘선’을 넘어 격의 없이 대화하는 ‘무선’ 통신의 문화를 만들어가자.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만날 때 감성은 한결 풍성해진다.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소통의 접점을 기민하게 찾아내는 순발력과 유연성, 바로 그것이 모바일 시대의 미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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