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9

2008.01.15

女 총리 있으면 뭐 하나 여성 차별 그대론데…

파키스탄 등 제3세계 ‘여성주의’는 요원 … 가문 후광 덕 거품 능력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베일 속의 이슬람과 여성’ 저자 euphra33@hanmail.net

    입력2008-01-09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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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 총리 있으면 뭐 하나 여성 차별 그대론데…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를 배출했지만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는 여성이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피살됐다. 그는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파키스탄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자 파키스탄 정치·경제 개혁에 앞장섰던 인물이며, 친미세력이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개혁 의지와 실천은 파키스탄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친미적인 외교정책도 파키스탄이 성장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부친 정치적 기반 없었다면 부토 총리 됐을까

    1988년 이슬람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부토는 얼마 뒤 남편과 자신의 부패 혐의로 실각했다. 93년 두 번째로 총리가 됐지만 또다시 실각하고, 99년에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부토와 남편이 집권 시절 나라에서 빼돌린 돈이 15억 달러에 이른다는 소문이 있었고, 무자헤딘 반군에게 무기를 대줬다는 무기 밀매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파키스탄 민주화에 앞장선 개혁·진보 세력이었음에도 비자금 의혹과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두 차례나 실각한 것은 그의 이력과 서방에 각인된 ‘민주 인사’라는 타이틀에 결정적인 오점이 됐다.

    그를 수식하는 또 하나의 명예로운 타이틀은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것이다. 여성에게 매우 보수적인 이슬람권에서 국가를 경영하는 총리직에 여성이 당선된 일은 세인의 관심을 끌 만한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부토가 여성의 영역을 ‘집 안’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이슬람 국가에서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성이라는 점보다 파키스탄 전(前)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이라는 점이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를 파키스탄 총리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파키스탄인들의 줄피카르 알리에 대한 향수와 신화다.



    그가 군사 쿠데타로 처형당한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에 의존하지 않았더라도 총리가 됐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3세계 국가에서 부토처럼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정치이념을 이어가는 딸들을 찾아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필리핀의 아로요,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 등은 모두 아버지나 남편의 후광을 등에 업고 탄생한 여성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대표성’보다 아버지나 남편의 신화를 재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대표성’ 때문에 정치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박정희 신화’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토는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였지만, 파키스탄인들은 총리로 등장한 그를 통해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의 정치이념은 아들을 통해 복원될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복원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복원하는 현실에서 ‘여성’ ‘남성’의 대표성은 큰 의미가 없다. 부토 가문의 명예와 정치이념이라는 ‘정치적 대표성’만 있을 뿐이다.

    여성에게 수많은 차별과 배제의 벽을 만들어놓은 파키스탄 사회에서 부토에게 좁은 문을 열어준 것이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도 사회참여를 할 수 있다는 하나의 계기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여성 총리’였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슬람 사회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주의 초기 단계에서는 성차(性差)를 특정 방법으로 무화(無化)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별을 낳는 주요 원인이므로 이를 철폐함으로써 차별을 없앨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됐다. 하지만 계급, 인종, 민족 등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모든 여성을 단일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이제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나아가 좀더 적극적으로 여성의 ‘내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동질적이라고 여겨지는 여성 범주의 배타성과 억압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파키스탄 한 해 5000명가량의 여성 명예살인

    유엔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 해 5000명가량의 여성이 ‘명예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키스탄은 명예살인으로 피해를 보는 여성이 가장 많은 나라다. 그러한 나라에서 이슬람 국가 최초로 여성 총리를 배출했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까?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상징성을 내세워 진보와 근대화라는 국가 이미지를 쌓으려고 한다면, 그때 여성은 계급·민족·종교 등에 갇힌 부속물에 불과할 뿐이다. 여성 총리가 경영하는 국가에 진정한 여성주의가 있었는가? 부토 전 총리의 삶을 정리하면서 함께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여성주의 담론이 첨예하게 발전한 우리나라에서도 이론의 발전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도 큰 괴리가 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빠르게 향상되고 의식 수준도 높아졌지만, 사회 핵심 영역으로 진출하는 여성은 여전히 극소수다. 즉 사회적 의사결정이 집중되는 영역으로의 여성 진출은 아직도 미약하며, 형식적 평등주의 확산에 비해 실질적 내용은 빈곤하기만 하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를 배출한 바 있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인수위원장 자리에 또다시 여성이 임명됐다. 대한민국 여성 정치인들은 파키스탄에서 민주와 진보의 상징으로 살다 간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의 죽음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여성의 실질적 평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고, 또 할 것인지에 대해 돌아보길 바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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