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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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21세기 국가경쟁력”

우리 언어문화 일군 귀중한 자산가치… 지식기반사회 자양분 인식 전환 필요

  • 진재교 성균관대 교수(한문교육학), BK21 동아시아융합사업단장 bakun@skku.edu

    입력2007-10-24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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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는 21세기 국가경쟁력”

    8월20일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천자문교실에 참가한 어린이들.

    2005년 1월부터 시행된 ‘국어기본법’은 공공기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어문규범에 맞게 한글로 공문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948년의 법률을 대체한 이 법은 한글 전용의 완결된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법의 시행에도 많은 사람들은 학습효과를 높이고 한자 문맹(文盲)을 극복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전에 없던 현상이다.

    뛰어난 조어력, 독서와 학습에 효율적

    경제계 인사들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의 효율적인 경제활동을 위해 한자능력을 입사의 주요 지표로 삼고 있다. 심지어 TV에서조차 한자퀴즈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자교육을 강조하니, 사회에서의 한자 학습은 열풍이 아니라 광풍에 가깝다.

    반면 공교육에서는 한글 전용 정책과 도가 넘을 정도의 영어교육에 밀려 한자와 한문 교육은 관심 밖이다. 중·고교 6년 동안 아예 한문과목을 배우지 않아도 졸업이 가능할 정도다. 이 역시 웃지 못할 현상이다. 공교육에서 찬밥 신세인 한자교육이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우선 한자 습득은 독서와 학습에 매우 효율적이다. 한자는 뛰어난 조어력을 지녔고, 개념어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한자와 한문을 공부하면 지식과 정보를 쉽게 습득하고 효율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의 한자와 한문 습득은 다른 교과목의 학습효과를 높이는 데도 도움을 준다.



    또한 대학 교양과목 이수는 물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도 한자 학습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한자능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는 것도 단순히 취업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대학교육 내실을 위해 한자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자 학습이 다른 과목의 효율적 학습과 관련이 깊다는 논리는 한글의 과학적 표기체계와는 별개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언어는 문화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경제적 효용가치를 지닌다. 이를 간단히 정의하면 언어와 표기수단의 시장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장성이 있는 언어와 문자(표기체계 포함)는 그 원산지(또는 사용지역)인 특정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상품가치가 매겨지게 마련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의 영향이 증대함에 따라 우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영어 공부에 휩싸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현상 아니겠는가.

    중국경제의 급부상과 한중 관계,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한자의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자 학습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며, 21세기 국가경쟁력과도 관련이 깊다.

    문자(표기체계)는 문화를 이해하고 세계를 읽는 하나의 코드다. 지난 몇천 년 동안 우리는 한자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거나 표상하고 우리 문화를 일궈왔다. 지금의 어문생활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자와 한자문화를 접하며 살고 있다. 한자를 통해 세계와 문화를 읽는 것은 단순한 전통의 계승을 넘어 중요한 문화적 자산가치를 이어받는 행위다.

    우리는 사고와 표기로 사물을 표상하는 과정에서 한글과 한자의 섞임과 융합을 자생적으로 경험한다. 문화적 자산이 경제적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의 시대에서 그 내부에 한글과 한자, 타 문화와 자국 문화의 교섭과 소통의 흔적을 간직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화적 자산과 경쟁력을 지니는 셈이다. 어느 나라든 교섭과 소통을 제외하고 자국 언어, 자국 문화의 성립과 발전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민족 정체성과 문화적 자산의 생성, 문화적 가치의 구현을 위해서도 우리 내부에 있는 한자와 한자문화의 흔적을 끄집어내 이를 소거하거나, 오직 순수 한글을 위해 한자의 흔적을 이질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이젠 낡은 발상이다.

    문화나 언어는 타자와의 교섭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를 이해하면 한자와 한자문화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한글과 한글문화 못지않은 문화적 자산가치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일본의 근대를 ‘번역의 근대’라고 일컫듯, 일본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과정에서 한자어를 적절히 활용해 개념어로 전환하면서 서구의 신지식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한자어로 만든 번역어와 개념을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해 ‘일본식 한자’의 공간적 확대를 꾀함으로써 일본식 한자문화의 보급은 물론, 일본 근대화의 성과와 문화적 자산을 동시에 이식한 바 있다. 그 흔적은 현재 우리의 언어생활 곳곳에도 남아 있다. 이는 어문생활에서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 전용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본식 한자 개념어의 극복과 한글 전용 실현을 위해서도 한자교육과 한자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한자문화의 가치 재발견 노력 음미해볼 만

    최근 서구적 ‘근대’에 대한 문명사적 반성이 제기되고, 미국식 문화가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나타난 무분별한 영어 사용과 영어 공용어 주장을 지켜보면서 이에 적극 대응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한자와 한자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은 음미해볼 대목이다.

    물론 요즘 불고 있는 한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일차적 목표는 경제적 요인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한자교육의 사회적 쏠림 현상을 그저 경제적 추구나 비즈니스를 위한 차원으로만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동아시아의 부상(浮上)에 따르는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한자와 한자문화가 지식기반사회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거시적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과거 언어문화 발전에 결정적 기제로 작동했던 한자의 역할과 필요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고쳐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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