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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근대화의 힘과 불평등 상징

기차, 근대화의 힘과 불평등 상징

기차, 근대화의 힘과 불평등 상징

기차는 소설 ‘무정’의 중요한 모티프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대부분 주제나 줄거리, 그리고 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의미 등을 위주로 읽게 된다. 하지만 한금윤 숙명여대 의사소통능력개발과 교수는 ‘모던의 욕망, 일상의 비애’(프로네시스)에서 작품 속 소품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간파하는 게 작품을 더 잘 감상하는 것이라고 한다. 등장인물의 주거환경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이 시대상을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사건과 인물, 주제의식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일상세태와 세시풍속에 대한 치밀한 자료 조사가 선행돼야 하고, 그것이 형상화되지 않으면 작품의 맛이 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일컬어지고, 한국의 근대문학 작품 가운데 고등학교 18종 문학교과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춘원 이광수의 ‘무정’(1917)을 보자.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경성학교 영어강사로 재직 중인 이형식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김 장로의 딸 김선형에게 연정을 품는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 계월향이 된 박 진사의 딸 박영채는 형식을 사모하며 절개를 지키다,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에게 겁탈당한다. 영채는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평양행 기차를 타지만 동경 유학생인 신여성 김병욱을 만나 순결이라는 봉건적 관습을 벗어버리고 자신도 당당한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한다. 일본 유학을 떠나는 영채와 병욱, 미국 유학길에 오른 형식과 선형이 우연히 같은 기차에서 만나게 되고, 이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하는 역군이 될 것을 다짐한다.

인물의 성격은 배운 바대로다. 이형식은 선형과 은인 박 진사의 딸 영채 사이에서 고민하는 햄릿형 인간이다. 하지만 고아 신분에 굴하지 않고 동경 유학에서부터 경성학교 영어교사, 그리고 신교육을 통해 조선의 문명을 개화시키는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여정을 보면 집안의 돈이나 권력에 기대 인생을 안주하는 ‘(마마보이 형) 모던 보이 귀족’이 아니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근대적 개인이자 선각자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영채는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고, ‘너는 형식의 색시 되어라’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형식을 마음 한가운데 두고 절개를 지키는 구식 여자다. 하지만 김병욱을 만난 후 천지개벽한 양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가는 개척형의 모던 걸로 바뀐다. 김선형은 비록 신교육을 받았지만 주체적이지 못하고 부모가 권하는 대로 결혼을 결정하는 ‘반(半)봉건’적 인물이다. 반면 김병욱은 자기 주관에 따라 행동하는 진정한 신여성이다.

‘무정’의 메시지는 ‘교육으로 조선을 근대화하자’는 것이다. 우연히 같은 기차에 탄 네 주인공은 삼랑진에 물이 넘치면서 기차가 멈추자 수해를 당한 농민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연다.



이광수 ‘무정’에서 사건 국면 대전환 역할

“‘과학! 과학!’ 하고 형식은 여관에 돌아와 앉아서 혼자 부르짖었다. 세 처녀는 형식을 본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을 주어야겠어요. 지식을 주어야겠어요’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거닌다. ‘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한참 있다가 병욱이가 ‘불쌍하게 생각했지요’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 한다. (…)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 하고 형식은 입을 꼭 다문다.”

자선음악회가 끝난 기차에서 이형식은 민족을 위해 지식인이 앞장서 민중을 계몽하면 ‘조선’은 강해진다는 선각자적 논리로 선형과 영채 사이에서의 갈등을 봉합한다. 그런데 ‘줄거리, 인물의 성격, 주제의식’이 모든 것을 실감나게 해주는 작품 속 소품이 없었다면 소설 ‘무정’이 한국문학사에서 길이 빛날 수 있었을까.

특히 기차가 그렇다. ‘무정’에서 기차는 갈등 해소를 위한 만남의 광장으로 사건의 국면을 대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자살하려던 영채가 그녀의 운명을 ‘봉건적 여성’에서 ‘신여성’으로 뒤바꾸어줄 선각자 병욱을 만나 ‘샌드위치’를 먹던 곳도 기차이고 형식과 선형, 영채 사이의 갈등은 삼랑진이라는 기차역에서 해소된다. 춘원은 왜 ‘기차’라고 하는 소설적 장치(소품)를 유독 좋아했을까.

근대사회에서 기차는 서로 다른 무수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무정’ 주인공들의 ‘우연한’ 만남이 개연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하이네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꿔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유길준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한 뒤 펴낸 ‘서유견문’(1889)에서 “철로가 여객을 싣고 화물을 운송하며 동서남북으로 달려 각지의 물산들을 교역하여 물가를 고르게 하고 도시와 시골을 간편히 오가게 하며 사회적인 교류와 상업을 일으킨다”라고 적었다. 박태원은 소설 ‘천변풍경’(1936)에서 전차가 운행되는 도시의 화려함에 매혹을 느끼는 경기도 가평 시골 소년의 모습을 통해 전차는 자동차와 더불어 근대 초기 세련된 도시의 상징이었고, 도시와 시골을 가르는 힘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무정’에서 형식 또한 “활동사진에서 서양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질풍같이 달아나는 양을 생각하고, 이런 때에 나도 자동차를 탔으면” 한다. 기차는 자동차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일제가 이식하려 한 서구적 근대의 세련미를 보여주는 도구였고 속도와 부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일제와 더불어 등장한 기차 앞에 당시의 조선인들은 압도됐다. 그 충격은 ‘짚신 신은’ 조선 소년 이형식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둔갑시킬 정도였다. 춘원 이광수가 ‘무정’에서 ‘기차’라는 소품을 통해 증언한 조선 근대화의 풍경이다.

“기차 바퀴가 궤도에 갈리는 소리조차 유쾌한 음악을 듣는 듯하고, 철교를 건너갈 때와 굴을 지나갈 때에 나는 굉음도 이형식의 귀에는 군악과 같이 들린다. 이제 머리에 흰 댕기를 드리고 짚신을 신은 소년은 이미 죽었다. 뺑하는 화륜선을 볼 때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 소년의 껍데기에 전혀 다른 이형식이라는 사람이 들어앉았다.”

돈에 따라 사람과 공간 구별 양극화 현주소

그래서 김철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문학과지성사 판 ‘무정’의 작품해설에서 ‘무정’의 주인공을 이형식이나 박영채, 김선형 등이 아닌 기차로 바꾸어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기차는 (특히 삼랑진 이후의 김선형 같은) 근대적 주체가 탄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기차는 열차시간표의 통일을 위한 전국 표준시의 제정, 열차 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과 그에 따른 근대적 시스템을 도입하게 한다. 산을 뚫고 강을 질러 일직선으로 목표를 향해 달리는 기차, 수많은 사람을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그럼으로써 동질적 국민을 만들어내는 기차, 후진이나 우회가 용납되지 않고 직진만이 최고의 미덕인 기차가 김철 교수의 말마따나 자본주의를 만들고 근대적 국가와 국민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무정’의 주인공들이 달려가고자 했던 기차(근대화)의 고통은 없었을까. 채만식은 장편소설 ‘탁류’(1938)에서 삼등칸에 탄 재호를 통해 기차는 양극화의 현주소라는 걸 고발한다. 근대는 새로운 문물로 사람들을 유혹했지만 모든 이에게 동일한 권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돈에 따라 사람을 구별했고 공간을 분리했다. 때문에 한금윤 교수는 “기차 내부의 공간분할은 단순한 기능적 분리가 아니라, ‘청결·쾌적함·편안함·불쾌함·복잡함·힘겨움’이라는 생활환경의 차별을 상징”하고 “일등칸과 삼등칸의 구분은 근대적 신분차별”이라고 한다. 기차는 속도를 내어 가는 근대화의 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불평등을 낳은 사회적 상징이란 말이다. ‘무정’의 기차가 그런 근대화에 몸을 실어 희망만을 ‘직진’시키고자 했던 우리들의 최초의 풍경이었다.



주간동아 2007.10.23 607호 (p94~95)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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