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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서해 로맨스’ 멀고 먼 웨딩마치

서해평화협력지대 기대 반 우려 반 … 北에 ‘현찰’ 주고 南은 ‘어음’ 받은 협상

남북의 ‘서해 로맨스’ 멀고 먼 웨딩마치

남북의 ‘서해 로맨스’ 멀고 먼 웨딩마치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서 출어한 한 어선(맨 오른쪽)이 연평도 앞바다에서 꽃게잡이 조업을 하고 있다. 어선 주변에 해군함정과 해양경찰청 특공대원 등이 삼엄하게 해상 경계를 서고 있어,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가까운 지역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1999년 6월15일 베이징(北京) 김고중 당시 현대아산 부사장이 서우두(首都)공항 입국장을 총총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서해공단 개발사업, 금강산 관광을 논의하기 위한 출장이었다. 그런데 김 전 부사장을 마중 나온 현대아산 간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가 말했다.

“큰일났어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김 전 부사장은 입이 바싹 타들어감을 느꼈다. 정오에 서우두공항을 이륙하는 평양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던 윤종용 삼성전자 총괄사장(현 부회장)도 출발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공항 밖에서 전전긍긍했다. 김 전 부사장은 현대아산 베이징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카운터파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걱정 마시라요. 전쟁 아닙네다. 바다에서 게 좀 잡으려다가…. 민족적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됩네다.”

1999년 6월15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두두두, 파바박…. 오전 9시28분. 북한군의 선제 사격이 시작됐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14분. NLL을 넘어온 북측 경비정은 해군의 포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채 북으로 패퇴했다. 6·25전쟁 이후 첫 남북 해군간 정규전(연평해전)이었다.



2000년 8월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트 김 위원장이 요트로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부른 것은 이례적이었다. 김 위원장이 정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심했소이다. 개성을 줄 테니 가서 구경해보시오.”

현대아산은 서해안공단 터로 해주를 원했다. ‘서해공단’이라는 이름으로 마스터플랜도 짜놨다. 그런데 북한은 신의주를 바랐다. 신의주는 현대아산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해주는 군사적으로 예민한 곳이었다.

“북한은 처음엔 나진, 선봉을 언급하다 신의주 카드를 꺼냈다. 윗분이 신의주를 거론했다기에 내가 직접 신의주에 갔다. 위화도(3300만m2·1000만평), 신의주(2600만m2·800만평)를 묶어 5900만m2(1800만평) 규모였는데 문제가 많았다. 항구가 몹시 작았고 토사가 흘러 확장도 어려웠다. 결국 김 위원장에게 리포트 2개(해주, 개성)가 올라갔다. 그 뒤 1년간 답이 없었다.”(김고중 전 부사장)

해주와 개성은 모두 군사적 요충. 둘 다 앞마당을 내주는 꼴이었다. 김 위원장은 장고(長考) 끝에 개성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현대가 줄기차게 요구한 해주는 북한 해군의 핵심 거점인 만큼 개성보다 걸끄럽다는 분석 때문이다.

2004년 12월15일 개성공단 이날 개성시 봉동리에 공장을 준공한 리빙아트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냄비가 밀려나왔다. 개성공단 생산품 1호. 김 위원장이 개성공단에 합의한 지 4년 4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개성공단은 현재 합의 7년이 지났음에도 1단계 사업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2007년 10월4일 평양(백화원초대소) 노무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10·4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평화 이슈가 경제적으로 투영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를 합의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 경제 분야의 핵심 성과. 그 중심엔 현대아산의 서해공단, 즉 해주경제특구가 있다.

북한이 8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해주특구를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수백 척의 함대와 지대함미사일로 무장한 북한 해군의 전진기지이자 군사적 요충이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 산업기지로 거듭날 수 있을까? ‘한반도의 화약고’ NLL이 ‘평화의 바다’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현대경제연구원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가운데 해주특구만의 경제 효과를 116억 달러로 예측했다. ‘점’(개성·해주·파주·강화)이 ‘선’으로 연결돼 ‘면’이 확보되는 동시에, 해주항이 인천항의 물류 부담을 분산하는 경제자유무역항으로 발달하고 서해안고속도로가 해주로 연결되면 파급효과는 그보다 크리라 예상된다.

평화보장이라는 면에서도 해주특구는 중요하다. 개성공단이 세워지면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인민군 병력의 일부가 후방으로 재배치됐다. 개성공단이 개성을 군사섹터에서 경제섹터로 상당 부분 바꿔놓은 것이다. 북한 인사들이 “군대까지 뺐는데, 개성은 아직도 몇 푼 떼먹는 임가공 수준”이라고 불평할 만큼 경제적 효과는 미흡하지만 정치·군사적으로 개성공단의 의미는 크다.

해주는 현대아산이 오래전부터 원했던 공단 터

해주는 북한 서해함대 전력의 60% 이상이 몰려 있는 곳이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10·4 공동선언의 청사진대로만 꾸려진다면 NLL은 기존의 ‘군사안보벨트’에서 ‘평화번영벨트’로 거듭날 수 있다. ‘평화+경제’ 카드로 ‘칼로 보습을 만들’ 실마리를 마련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라는 평가다.

“한강 하구를 공동으로 이용하고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인천 파주 강화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경협벨트가 된다면, 이는 북한이 전쟁을 포기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북한전문가 권오홍 씨)

그러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축은 걸림돌이 적지 않다. △인프라 구축 비용 △북미관계 개선 속도 △개혁, 개방에 대한 북한의 의지 등이 장애물로 거론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해주특구를 약 1650만m2(500만평·해주항 확장 및 외곽 인프라 제외)로 가정할 때 46억 달러가 소요되리라 예상했다. 정부와 공기업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지면 개성공단의 전철을 밟을 수 있으며, 퍼주기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을 옥죄온 테러 지원국·적성교역법 적용을 해제하고, 북미간 연락사무소 설치 및 북미수교 등이 이뤄진다면 해주특구는 속도를 낼 수 있다.

정보당국의 북한 자료(위성사진, 지리정보스템 등)를 토대로 해주의 인프라(산업 및 기반시설)부터 톺아보자.

남북의 ‘서해 로맨스’ 멀고 먼 웨딩마치
[사진 1]에 보이는 ‘10월13일 청년제련소’는 일본에서 용광로, 전해설비를 도입해 1985년 세워졌다. 고해상도 위성사진 속 제련소 야적장은 비어 있으며, 굴뚝에선 연기가 오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기의 위성사진으로 보더라도 해주화학공장[사진 2] 등 해주의 공장들은 경제난으로 공장 가동이 원활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 3]의 해주제련소는 황산 10만t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으며, 해주시멘트공장에서 생산되는 시멘트로 벽돌 타일 등을 만든다. 화학공업으로는 해주화학공장, 해주인비료공장, 해주타이어공장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해주직물공장, 해주피복공장, 해주곡산공장, 해주연결농기계공장[사진 4] 등 경공업공장도 눈에 띈다. 해주제지공장은 현대적 설비를 갖추고 있다.

해주는 개성에서 80km 떨어져 있으며, 남측 수도권으로의 접근도 유리하다. 해주항은 제대로만 개발된다면 중국 수출에도 이점이 생기게 된다. 개성-해주와 파주-강화를 잇는 남북경협산업벨트도 구축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점’(개성·해주·파주·강화)을 ‘선’으로 연결해 ‘면’을 확보하는 공업지대 개발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해주의 인프라는 태부족이다. 현대아산이 공업지구 입지로 해주를 요구하자, 북한은 “군사지역인 데다 바다가 깊지 않다”며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북한 서해 제2의 항구인 해주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아 6000t 미만의 선박만 접안할 수 있으며, 하역장비[사진 5]가 노후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해주시멘트공장과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된 해주항[사진 6]의 하역 능력은 240만t, 접안 능력은 1만t에 그친다. 정부는 2015년까지 2200억원을 투입해 해주항을 2개의 컨테이너 선석을 포함한 8개 선석으로 개발한다는 복안이다. 대북 개발사업을 담당해온 주무기관 토지공사와 민간연구기관 현대경제연구원은 해주항 확장에 각각 3000억원, 27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해주항 확장에 약 3000억원 소요 추정

1999년 현대아산은 해주항을 개보수하는 수준을 넘어, 해주-강령을 잇는 연륙교를 건설해 강령반도에 공단을 조성하고[공단( 2600만m2·800만평)과 배후도시(6600만m2·2000만평)] 신해주항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개펄이 발달하고 수심이 얕아 수시로 준설이 요구되는 해주항의 한계를 보완하겠다는 의미였다. 현대아산의 해주공단은 시범공단(1공단, 330만m2·100만평), 2공단(990만m2·300만평), 3공단(1300만m2·400만평)으로 이뤄졌다.

해주항이 군사적 대치가 첨예하던 NLL을 가로지르는 남북경협산업벨트의 핵심 항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확장보다 신(新)해주항 건설이 적합하다는 평가다. 해주특구가 바다에 면해 있는 만큼 개성공단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아산의 신해주항 건설 구상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해주의 또 다른 취약점은 공업용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해주시멘트공장에 폐열을 이용한 공장화력발전소가 있지만, 발전량이 미미하다. 황해남도에서 생산되는 전력량은 소비되는 전력량의 10%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정부는 문산변전소와 현대아산 서해공단 사이에 송전선로(154km, 공사비 1000억원)를 구축해 8만kWh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로와 철도가 남북경협산업벨트로 기능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사진 7]에 보이는 황해청년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는 1930년대 수준인 데다, 해주와 주변을 지나는 고속도로도 없다. 포장도로의 길이 역시 총연장 161.1km에 그친다. 옹진선, 부포선 등은 협궤철도로 경제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해주항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 개성공단 및 한국과의 연계를 높이기 위해선 경의선과 배천선(해주-배천)의 연결이 필요하다. 토지공사는 사업비가 180억원가량 소요될 것으로 예측했다.

개성 사리원 용연 평산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폭이 좁고 비포장이 많다. 특히 개성-해주를 잇는 길은 최소한 편도 2차선(80km)의 포장도로여야 한다. 이 도로엔 예성강을 건너는 1km의 교량도 필요한데, 도로 정비에 용지비를 제외하고 60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적으로는 해주-평양 고속도로, 개성-해주-옹진, 해주-장연을 잇는 도로망도 필요하다.

개혁, 개방에 대한 북한의 의지도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개혁, 개방보다 체제유지와 후계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게 다수 북한전문가들의 평가다. 북한은 ‘점’과 ‘점’이 연결돼 ‘선’ ‘면’이 만들어지는 것을 꺼린다. 북한은 ‘섬’처럼 고립된 곳에서 경제적 이득을 거둬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 상징물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는 개성공단이 그렇다. 자본주의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체제유지와 후계문제는 북한 정권 처지에선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북한은 해주특구 제안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해주특구는 ‘단기적으로’ 북한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10월3일 오전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해주특구 얘기를 꺼내자, 김 위원장은 개성공단 개발 속도에 불만족을 드러내면서 남쪽을 믿기 어렵다는 뜻의 말을 했다. “점심 먹고 짐 싸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김 위원장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에서 비롯했다.

10·4 공동선언에서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합의한 경제담론은 제5항에 담겨 있는데, 특히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했다”는 대목이 경제와 평화를 패키지로 엮은 조항이다.

남북의 ‘서해 로맨스’ 멀고 먼 웨딩마치
이 조항을 톺아보면 북한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공동어로구역,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그림 1]는 북한이 바라는 대로 11월 국방장관회담 결과에 따라 빠른 시기에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현찰’이다. 그러나 남측이 제기한 해주특구, 한강 하구 공동이용 등은 회임 기간이 긴 ‘배서된 어음’이다. NLL 무력화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사안에서 북한이 ‘단기적 성과’를 얻고 한국의 제안은 ‘추진해나가기’로 한 셈이다(상자기사 참조).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평양은 해주특구를 다음 정권과 진행할 사안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 개방이라는 표현에 북한이 거부반응을 드러내는 데서 짐작해볼 수 있듯, 북한은 경제특구를 통해 ‘남풍(南風)’이 유입되는 것을 아직 원하지 않는 듯하다. 해주특구가 ‘섬’처럼 고립된 개성공단과 달리 개성-해주-파주-강화-인천을 잇는 평화경제벨트로 현실화되는 데는 8년의 줄다리기보다 더 지난한 고비를 넘어야 할 것 같다.

10·4 공동선언 ‘톺아보기’

선언한 것 많지만 실제 합의는 별로


10·4 공동선언은 남북간의 온갖 문제가 나열돼 있지만, ‘나가기로’ ‘추진해나가기로’류의 어미(語尾)가 많다. 그래서 “선언은 있으되 합의는 별로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6·15 공동선언을 강화한 것으로, 새로운 장을 열지는 못했다”(뉴욕 타임스)는 것이다.

‘추진하기로’ ‘추진해나가기로’ ‘협력해나가기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노력하기로’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로’ 등의 말로 마무리된 문장은 ‘결정(決定)’된 것이 아니다. 이들 문장은 대부분 기존 논의를 재언급하거나 추후에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 ‘나간다’ ‘참가하기로 하였다’ ‘격상하기로 하였다’ ‘갖기로 하였다’ 등으로 끝난 문장만이 ‘행위를 확정하는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사실상 이런 범주의 문장만이 결정된 합의라고 볼 수 있다.

경제담론이 담긴 제5항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하였다”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를 제외하면 모든 문장이 결정되지 않은 어미를 쓰고 있다.




주간동아 2007.10.23 607호 (p14~17)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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