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4

2007.09.25

상대적 가치 인정과 우상 타파의 길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10-01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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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과연 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는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4대 우상론이 나온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이다. 세계를 ‘인간’이라는 종족에 한해 인간이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우상 현상이다. 장자의 ‘제물론’이 바로 종족의 우상을 경계하자는 철학우화다.

    “암원숭이는 긴팔원숭이가 짝으로 삼고, 순록은 사슴과 교배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여희는 사람마다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를 보면 물속 깊이 숨고, 새는 그를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은 그를 보면 기운껏 달아난다. 이 넷 중 어느 쪽이 이 세상의 진짜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중국 고대의 절세미인 여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호감을 갖게 마련이지만 동물 처지에서는 피해야 할 대상이다. 미와 추, 선과 악, 참과 거짓 등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쉰이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에서 풍자한 바 있듯, 대상을 인식하는 데 ‘옳고 그름 등을 따지지 않는 지나친 상대주의’는 ‘무시비관(無是非觀)’이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빠질 위험도 있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이다. 개인의 좁은 경험·소견·착각·호오(好惡)·편견·선입관으로 인해 벌어지는 인식의 오류 현상이다. 이런 오류에 빠진 여름벌레는 ‘겨울의 고드름을 알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는 바다를 볼 수 없다’(‘장자’ 추수 편)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라는 시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보는 곳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건/ 이 몸이 이 산속에 있는 탓이라네(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의 여산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에는 천애의 바위들이 항상 안개에 휩싸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산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소동파는 여산 ‘안에서’ 여산을 보면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 여산의 전체를 알 수 없다고 노래했다. 여산 안에 있는 화자는 ‘부분(나무)만 보고 전체(산)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진 셈인데, ‘여산 안(우물 안 개구리)’의 시점이 곧 ‘동굴의 우상’이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이다. 시장의 우상은 시장판 장사꾼들의 입씨름처럼 인간의 언어로 인해 일어난다. 수많은 말이 오가지만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이 되는 과정에서 개념적 약속이 틀리거나 해석 도중 모호한 언어가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가 실재와 혼동되고, 실재가 아닌 우상으로 행세한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극장의 무대를 보고 환호하는 관객들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영화는) 만들어진 것(가공된 2차 현실)’임에도 마치 ‘있는 그대로인 것’인 양 착각해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한 지식이나 학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우상 현상이다.

    베이컨은 이 네 가지 우상을 없애지 않으면 사물의 본질을 알기 어렵다고 한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도 산문 ‘능양시집서(菱陽詩集序)’에서 동굴의 우상을 경계한 바 있다.

    “아아! 저 까마귀를 바라보자. 그 날개보다 더 검은 색깔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햇빛이 언뜻 흐릿하게 비치면 얕은 황금빛이 돌고, 다시 햇빛이 빛나면 연한 녹색으로도 되며, 햇빛에 비추어보면 자줏빛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눈이 아물아물해지면서 비취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푸른 까마귀라고 불러도 옳으며 붉은 까마귀라고 불러도 역시 옳을 것이다. 그 사물에는 애초부터 정해진 색깔이 없건만 그것을 보는 내가 눈으로 색깔을 먼저 결정하고 있다. 어찌 눈으로만 색을 결정하는 것뿐이랴? 심지어 보지도 않고 미리 마음속으로 결정해버리기도 한다.”

    흔히 까마귀는 검다고 한다. 하지만 빛에 따라서 외양이 시시각각 변한다. 때문에 연암은 ‘까마귀는 검은 것’이라는 ‘단 하나의 인습적 사고’로는 까마귀의 참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사물의 입체감·명암·색채 등은 빛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달라지는 ‘순간순간’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인상파 화가들의 이론과 흡사하다.

    예컨대 모네는 성당의 색조가 ‘빛’의 변화, 즉 아침·저녁·낮·석양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회색·청색·백색·갈색 등으로 ‘루앙 성당’을 다양하게 그렸다. 마찬가지로 까마귀를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푸른 까마귀·초록 까마귀·붉은 까마귀로 그릴 수 있다는 게 연암의 논리다. 대상의 본질을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미리’ 주입된 주관적인 눈으로 보지 말아야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연암은 까마귀의 비유를 통해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쓰기를 비판했다. “문(文)은 양한(兩漢·사마천 ‘사기’, 반고 ‘한서’)을 모범으로 삼고, 시는 성당(盛唐·이백과 두보)을 본받아야” 한다는 식의 고정된 인습은 한당(漢唐)의 아류일 뿐이지 창조적인 글이 아니라고 한 까닭은 바로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한의 문과 당의 시가 보편공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시대와 장소와 사회적인 조건과 글쓰기 대상에 따라 글이 다양하게 변통돼야 참된 글쓰기라는 논지다.

    ‘명화 속 흥미로운 과학이야기’(시공아트)는 예술도 우상을 벗어난 과학적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후기인상파 세잔(1839~1906)은 동일한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뒤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다. 여러 시점으로 대상을 바라본 ‘정물’은 소실점이 4개다. 꽃병은 화면 왼쪽 위에서, 설탕 단지는 수평선 높이, 과일바구니는 화면 아래쪽, 바구니 속 과일은 화면 오른쪽이 각각 소실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세잔은 대상의 변치 않는 본질을 그리기 위해 색채분할법을 선보였다. 눈에 보이는 실제의 색을 그대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시점에 따라 다른 사물의 색을 모자이크처럼 조합해 입체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옛것을 근본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창조(法古創新)’한 것처럼 세잔은 르네상스 이후 소실점을 하나로만 고정시킨 전통적 원근법의 권위, 즉 극장의 우상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렇게 ‘다시점 원근법’을 낳은 세잔은 피카소의 큐비즘(입체주의·Cubism)을 낳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 ‘빌헬름 우데의 초상’ ‘마라 부인’ 등에서 ‘셀 수 없는’ 무한한 소실점으로 대상을 관찰해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고 분해한 다음 재구성하여 형상화했다. 프랑스 과학자 푸앵카레의 저서 ‘과학과 가설’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사진술, 엑스레이 등과 같은 과학적 기술에 큰 영향을 받아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박지원과 장자처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 소동파의 ‘여산진면목’처럼 나무만 보지 말고 산을 보려는 시야, 세잔과 피카소처럼 대상을 다각도로 보려는 접근방법 등이 우상을 타파하면서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는 앎(知)의 고투일 것이다. 논술은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놓고 우상에 빠지지 않아야 창의력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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