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4

2007.09.25

한국인 ‘매운맛’ 선호엔 특별한 맛이 있다

어지간한 맛에 만족 못하고 더 큰 자극 원해

  •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7-09-19 17: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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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매운맛’ 선호엔 특별한 맛이 있다

    해물떡찜을 먹고 있는 여성들. 매운 음식을 다루는 식당에서는 여성 고객이 70~80%에 이른다고 말한다(장소 제공·홍대 해물떡찜 0410).

    “매운맛이 사무칠 때~.” 한 고추장 광고에서 이탈리아에 간 남자배우는 파스타를 앞에 두고 고추장의 매운맛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그 절절함에 공감할 터.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더라도 매운맛에 대한 ‘땡김’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현상이다.

    그뿐인가. ‘얼큰하다’ ‘시원하다’ ‘얼얼하다’ ‘개운하다’…. 한국어에는 유독 매운맛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다. 단어만으로 따지면, 매운맛은 복합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굳이 세계 1위의 고추 소비량을 자랑한다는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고추장 먹고 힘내라’ 하고, 매일 세끼 식사에 김치를 먹는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은 유별나다.

    “입이 화~하면서, 스트레스도 화악~ 풀리는 것 같아요.”

    H상사에서 근무하는 이은미(26) 씨는 매운맛 광이다. 선물 딜러인 그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 동료 여직원들과 함께 매운맛을 찾아 나선다고.

    “낙지볶음, 떡볶이, 불닭, 그리고 요즘엔 해물떡찜…. 맛집 찾아다니기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매운 음식을 주로 찾아다녀요.”



    그는 업무상 극도의 긴장감을 느낄 때가 많다.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그의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인 셈.

    “속이 좋진 않죠. 그래도 자꾸 먹게 돼요. 은근히 중독성도 있는 것 같고요. 함께 근무하는 한 동료는 매운 음식을 먹고 약까지 복용할 정도로 배앓이를 했으면서도 다음 날 또 매운 음식을 먹으러 가더라고요.(웃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씨처럼 ‘매운맛 중독’에 대해 말한다. 엄밀히 말해 매운맛은 미각보다 통각(痛覺)에 해당한다. 매운맛을 내는 대표 성분 캅사이신은 혀의 말단신경을 건드리면서 ‘입 안에 불이 난 것’ 같은 통증을 유발한다. 따라서 계속 매운맛을 찾는 이유는 통증에 둔감해져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매운맛 즐기면 위암 걸리기 쉽다는 속설 사실과 달라

    어떤 학자들은 혀끝에서 느끼는 통증이 뇌로 전달될 때마다 자연진통제인 엔도르핀이 분비돼 순간적인 도취감에 빠지기 때문에 마치 ‘공포스러우면서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운맛을 선호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사실 매운맛을 내는 고추 등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향신료다. 음식전문가들은 매운맛이 입맛을 살리는 데 탁월하다고 말한다. 푸드테라피스트 김연수 씨는 “매운맛은 가라앉은 기운과 원기를 북돋아주는 구실을 한다”고 설명한다.

    “고추의 경우 매운맛을 내는 캅사이신이 체온을 높이기 때문에 지방분해에도 도움이 돼요. 그래서 다이어트와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도 좋죠. 실제로 일본에서는 한때 고추 다이어트가 유행하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매운맛을 내는 캅사이신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서울대 약대 서영준 교수는 지난 7월 국제 약학저널 ‘안티옥시턴트 산화환원’에서 캅사이신이 세포에 활성산소를 축적해 암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때 매운맛을 즐기는 한국인이 위암에 걸리기 쉽다는 속설이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매운 고추를 즐기는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위암 발병률은 낮아요. 캅사이신은 이미 진통제나 약품으로 사용되고 있고, 몇몇 연구를 통해 암을 예방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래도 과한 것은 금물. 서 교수 역시 지나친 매운맛은 “위 점막을 자극해 위장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요즘 일부 식당에서는 음식을 무조건 맵게 만들기 위해 캡시컴(올레오레진 캡시컴)이라 불리는 매운맛 추출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 스푼만 넣어도 비슷한 양의 청양고추 50~100배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 한 식품 전문가는 “설탕 대신 사카린을 쓰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설명하면서 “몸에 해가 된다고 할 순 없지만 자연발효식품인 고추장에 비하면 추출물은 영양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매운맛이 한국의 대표 맛으로 꼽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매운맛을 선호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고추를 아시아에 소개한 것은 유럽인이었고, 고추는 인도와 동남아, 동북아로 건너왔다. 전 세계 인구 중 4분의 1이 매일 고추가 든 음식을 먹고 있다고 한다.

    요리평론가 노다 씨(www.noda.co.kr)는 “한국 음식의 매운맛은 달달하게 시작해 뒷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남미나 동남아 등 더운 기후권의 나라일수록 매운 음식이 많고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요리 중에도 매운 음식이 꽤 있습니다. 단, 이들의 매운맛은 첫맛이 찌릿할 정도로 강하지만, 청양고추로 대표되는 우리의 매운맛은 처음엔 달달하다가 중간쯤에 매운맛을 느끼고, 나중에는 아플 정도로 맵죠. 그래서 서양인들이 처음에 멋모르고 덤볐다가 나중에 난리가 납니다.”

    한국의 매운맛은 ‘감칠맛’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할라피뇨나 칠리페퍼에 비해 매운맛은 덜하지만, 단맛을 가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인은 그 감칠맛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매운맛의 인기는 여전하다. 지난 5년 사이 김치가 더 매워졌다는 점만 보더라도(한국식품연구원 구경형 박사팀이 2002년과 2007년 시중 판매 김치의 캅사이신 함유량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5년 사이 0.6~0.8mg%에서 2.0~3.0mg%까지 치솟았다) 앞으로 매운맛 선호현상은 계속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팁. 너무 매울 때는 물을 벌컥 마시는 대신 차가운 우유나 유지방 아이스크림을 먹도록 한다. 물로는 해결되지 않는 캅사이신이 우유나 아이스크림에 의해 쉽게 흡수돼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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