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3

2007.09.18

100년 恨 ‘감금의 섬’ 육지와 짠한 마음 잇는다

소록도와 녹동항 연결 소록대교 추석 때 임시 개통… 한센병 환자 세상과 호흡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7-09-12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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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恨 ‘감금의 섬’ 육지와 짠한 마음 잇는다

    녹동항 쪽에서 바라본 소록대교와 소록도.

    8월 마지막 날, 소록도를 찾았을 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일주일 전 처서(處暑)가 지나서일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후텁지근하던 바람이 선선했다.

    전남 고흥군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도는 16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섬 전체를 빼곡히 메운 짙푸른 나무들, 섬 한쪽에 마련된 조그마한 선착장과 하얀 ‘순록탑’, 경찰임시초소 등 변한 것이 없었다. 1991년 대학 졸업여행을 이곳으로 왔었다.

    달라졌다면 녹동항과 소록도를 오가는 배가 통통배에서 페리호로 바뀐 정도다. 한적한 어촌에서 지금은 수많은 횟집과 술집, 모텔 등 현대식 건물들로 채워져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변해버린 녹동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녹동항에서 소록도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직선거리로 600m가 채 되지 않는다. 통통배로 10분 거리가 요즘은 페리호가 다니면서 3분 거리가 됐다.

    이제 이 사이에 다리가 놓인다. 섬 이름을 따 ‘소록대교’로 명명된 이 다리는 오는 추석 때 사람들만 통행할 수 있도록 임시 개통된다. 1916년 일제강점기에 한센병 환자들이 집단 수용되면서 ‘천형(天刑)의 땅’으로 변해버린 이후 91년 만에 비로소 세상과 통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멸시와 천대의 섬, 오랜 세월 고립된 채 한(恨) 많은 역사와 흔적들로 가득한 이곳이 진정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이나 다름없다. 소록도 선착장에 내려서면 곧바로 ‘국립소록도병원’이라는 팻말이 붙은 입구가 나온다. 10여 년 전만 해도 병원 측의 허가 없이는 일반인의 섬 출입이 불가능했다. 요즘도 한센병을 앓았던 병력(病歷)자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한센병에 대해 무지했던 과거에는 병원균의 전염 우려 때문이었지만, 요즘은 병력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다.

    병원 입구부터 오르막길이다. 이 길을 걸어 야트막한 야산 하나에 올라서면 성당을 지나 빨간 벽돌건물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병원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 가족이 거주하는 관사다. 이들의 생필품을 판매하는 매점은 과거 사무본관으로 쓰이던 건물이다. 그곳에서 소록도 해수욕장이 자리한 해안 쪽으로 병원 원장 관사가 있다. 멀리 수평선과 백사장으로 이어진 해안선 등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무척 아름답다. 그런데 괜스레 서글퍼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 집단수용 ‘천형의 땅’ 섬 전체가 병원

    100년 恨 ‘감금의 섬’ 육지와 짠한 마음 잇는다

    가족과 떨어져 소록도 병사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한 할머니가 작은 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인 1936년 4대 원장이던 수호(周防正季) 원장 임기 중에 지어진 것들이다. 33년 부임해 42년 피살되기까지 수호 원장의 재임기간은 소록도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는 발각되는 즉시 곧바로 소록도로 강제 이송됐다. 이전 원장 때까지만 해도 700명 정도에 불과하던 환자가 수호 원장 시절 5000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끔찍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그 무렵 소록도로 끌려온 환자들이 지금도 일부 생존해 있다. 올해 90세인 장모 할아버지가 그중 한 사람이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장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시절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1935년 3월15일,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다. 보통학교(현 고등학교)에 다니다 병에 걸려 부모와 생이별을 한 것. 부모와 친척들은 그 후 월북해 아직도 생사를 모른다.

    장 할아버지는 오자마자 노역장으로 끌려갔다. 선착장 공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하루 종일 벽돌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장 할아버지의 회상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계속 일했어. 나머지 사람들은 밤을 새서 가마니를 짜거나 소나무에서 송진을 긁어냈고. 안맥(보리쌀) 두 홉에 쌀 두 홉씩 주면서 그렇게 일을 시킨 거야. 장정 한 끼 식사로도 모자란 양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어. 수없이 죽어나갔지. 힘들어서 죽고, 배고파서 죽고, 맞아서 죽고, 도망가다 물에 빠져 죽고…. 광복될 때까지 10년간을 그렇게 살았어.”

    한 많은 감금실·정관절제수술·오마도 간척공사

    빨간 벽돌건물들은 1936년 그해 만들어진 벽돌로 지은 것이다. 수호 원장이 자행한 악행의 흔적은 섬 곳곳에서 발견된다.

    직원지대를 지나 제2검문소부터는 병사지대다. 그곳에서 진입로를 따라 700m 정도 더 들어가면 현재 사용 중인 국립소록도병원 본관이 나온다. 그 뒤쪽으로 또 다른 빨간 벽돌건물들이 남아 있다.

    가장 위쪽이 감금실이다. 수호 원장 시절, 섬을 탈출하다 붙잡히거나 절도 등 범죄를 저지르다 걸린 환자들은 한바탕 매질을 당한 뒤 모두 이곳에 감금됐다. 그리고 남자 환자들은 강제로 정관절제수술을 받아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혹독한 노역으로 사망하거나 감금실에서 고문받다 목숨을 잃은 시신은 그 옆 검시실(시체해부실)로 옮겨져 난도질당해야 했다. 정관절제수술의 잔재는 광복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환자끼리 결혼할 때 남자에게 정관절제수술을 받도록 병원 차원에서 유도한 것. 이런 일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장 할아버지도 결혼하면서 수술을 받아 자녀가 없다.

    여기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조경이 잘된 중앙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근대사가 중첩돼 있다. 중앙공원 위쪽에 있던, 일제강점기에 환자들의 참배를 위해 세워진 수호 원장의 동상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가 환자들을 향해 훈시할 때 올라섰던 바위는 남아 있다. 그 바위는 갖은 핍박과 강압을 이기지 못한 어떤 환자가 수천여 명이 보는 앞에서 수호 원장을 피살한 곳이기도 하다.

    중앙공원 한가운데 세워진 구라탑은 1963년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이 오마도 간척공사 근로봉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오마도 간척공사는 소록도 사람들의 또 다른 아픔이다.

    1961년 소록도병원에 부임한 조창원 원장은 한센병 환자와 그 가족이 거주할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협조를 얻어 다음 해부터 인근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소록도에 모여 살던 한센병 환자는 무려 600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의 가슴은 벅찬 꿈으로 부풀어 올랐다. 볍씨 한 톨 심을 수 없는 돌섬에서 벗어나 농사가 가능한 새로운 땅을 갖는다는 일 자체가 희망이었고 기적이었다. 숱한 자연재해와 환자들의 익사사고가 잇달아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희망 하나로 간척공사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2년 후 간척사업 주체가 전라남도로 넘어가고 말았다. 녹동 등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원인이었다. 여기에는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 정치인의 당선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렇게 소록도 사람들의 꿈은 물거품으로 변했다.

    그 아픔은 아직도 소록도 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원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희망의 터전을 잃은 것보다 더 힘들었던 일은 도저히 허물 수 없는 높은 편견의 벽 앞에서 느껴야 했던 좌절감이다. 일제강점기의 강제노역은 사라졌지만 편견의 벽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던 것. 그것은 섬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찬가지였고, 한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환자들과 직원들이 다니는 길, 선착장이 달랐다. 지금의 선착장을 이용하던 직원들과 달리 환자들은 제2검문소 옆길로 연결된 ‘제비선창’을 이용했다. 환자들이 타고 내리는 육지 쪽 선착장도 달랐다. 녹동항에서 한참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곳을 이용해야 했던 것. 녹동항 주민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환자들이 녹동항의 음식점에서 쫓겨났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소록도 안의 모습은 과거와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환자나 원생이라는 명칭도 사라졌다. 병원 관계자의 이야기다.

    “요즘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러요. 이미 한센병이 완치돼 더 이상 환자가 아니거든요. 병원 치료를 받는 분들은 대부분 일반 노인들처럼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을 뿐이죠.”

    환자들이 섬을 나갈 때도 과거에는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신고만 하면 된다. 승용차를 몰고 어디든 다닐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전동 휠체어를 타고 마을을 자유롭게 다닌다. 이제 남은 건 외부 사회의 편견이다. 녹동항 식당이나 술집들은 여전히 환자들의 출입을 꺼린다. 하지만 이 정도는 조금 불편할 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한 사회와 가족의 외면이다.

    외부와 오랜 단절 독특한 생활패턴 깨질 우려

    100년 恨 ‘감금의 섬’ 육지와 짠한 마음 잇는다

    1998년까지 사용된 소록도 교도소.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 중 한센병 환자들은 이곳으로 옮겨져 수감됐다.

    소록도 주민자치회 김명호 회장(58)은 “소록도에 사는 사람 가운데 자식 있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자식이 있어도 결혼식에 못 가고 자식들도 부모가 소록도에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서 한숨지었다. 다리가 연결돼도 올 사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이용해 밖으로 나갈 환자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어제도 한 분이 돌아가셨고, 오늘 또 한 분이 돌아가셨다. 한 해에 평균 50~60명씩 장례를 치른다. 이제 640여 명이 남았는데 평균 나이가 74, 75세다. 전동휠체어를 타고라도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 그중 5분의 1도 안 된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다리가 연결되면서 오히려 소록도 환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다. 외지인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절도 등 크고 작은 범죄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소록도에 방목되고 있는 수백여 마리의 사슴을 노리고 불법 밀렵꾼들이 몰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 회장은 외부와의 오랜 단절 속에서 형성된 환자들의 독특한 생활패턴이 깨질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한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독실한 종교인이다. 80%가 개신교, 20%가 천주교 신도다. 오랜 세월 수없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종교 덕분이었다. 종교는 이들에게 삶이자 생활이다.

    이곳 주민들의 기상시간은 새벽 4시. 그래야 5시 새벽예배에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은 오전 11시, 저녁은 오후 4시에 먹는다. 부부는 집에서 식사를 하지만 독신자들은 공동으로 식사하기 때문에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 소록도에서는 저녁 8시면 한밤중이다.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배가 여름에는 저녁 6시30분, 겨울에는 5시30분에 끊기는 것도 이곳의 생활패턴과 무관치 않다. 다리가 놓이고 외지인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몰려올 경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자 병사지대 마을에는 인적이 거의 끊겼다.

    다음 날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그러지 않아도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소록도 병사지대에는 6개의 마을이 있다. 2개의 마을이 더 있었는데 사람 수가 줄면서 사라졌다. 폐허로 변해버린 옛날 가옥들은 몹시 허름하고 비좁아 과연 사람이 살았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지금 환자들이 거주하는 집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을 조금씩 개조해서 살고 있다. 부부가 사는 방이라고 해봤자 7㎡ 남짓하다. 직원지대의 집들과는 천지차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 조그만 방 안에서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던 허모 할머니(75)와 나이조차 모른다는 김모 할머니는 연신 “옛날에 비하면 낙원이 따로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섬 중앙 산 중턱에는 높다란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섬에서 숨진 환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만령탑’이다. 지금까지 모두 1만500여 위의 분골이 이곳에 봉안돼 있다. 그 아래 숲 속에 한 무리의 노루들이 비를 피하며 한가로이 뛰놀고 있었다. 그곳에서 소록도와 바깥세상이 연결된 소록대교가 정면으로 보였다.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다.

    ‘세상이 소록도를 허락한 것일까? 아니면 소록도가 세상을 허락한 것일까?’

    인터뷰 국립소록도병원 오동찬 원장 직무대리

    “전염성 없는 양성환자 12명… 10년 후면 한센사업 끝날 듯”


    100년 恨 ‘감금의 섬’ 육지와 짠한 마음 잇는다
    국립소록도병원 원장은 7개월째 공석이다. 올해 2월28일 퇴임한 김정원 원장 이후 아직까지 후임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오동찬 의료부장이 직무대리를 맡고 있다. 오 원장 직무대리는 13년째 이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최장기 전문의다.

    - 원장이 공석인 이유는?

    “월급이 다른 병원장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국가병원보다도 적다. 다른 국가병원은 외부 환자를 보고 보험공단에서 그에 따른 수가를 추가로 받을 수 있지만, 여기는 외부 환자가 없다. 그러다 보니 보건복지부 직원들조차 거절해 발령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 병원 운영상 가장 어려운 점은?

    “전문의 자격증을 가진 정규직 의사들을 구하기 힘들다. 공중보건의가 있긴 한데 군복무 기간이 끝나면 대부분 돌아가기 때문에 진료의 연속성이 떨어진다. 심지어 한 달 동안 산부인과만 빼고 모든 분야의 진료를 다 본 적이 있다. 난 치과의사인데….”

    -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는 얼마나 되나?

    “균을 보유한 양성환자가 12명 정도 있는데, 이들도 전염성은 전혀 없다. ‘항나제’라는 약을 6개월 정도 복용하고 주사를 두 번만 맞으면 전염성은 사라진다. 그런데 이분들은 벌써 수십년간 약을 먹고 있다.”

    - 어떤 환자들이 가장 많은가.

    “평균 연령이 74세라고 하는데 40, 50대 20~30명만 빼면 대부분 80대 이상이다. 따라서 고령으로 인한 당뇨 고혈압 암 갑상선질환 등 만성 질환을 다 가지고 있다. 거주자 641명 중 550명이 만성질환 한 가지씩을 가지고 있다.”

    - 새로운 환자가 발생할 확률은?

    “유병률이 0.4% 정도 된다. 100만명 중 4명 정도다. 조기에 발견하면 다 치유된다. 장애도 거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전국에 나환자를 진단하는 의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장비를 갖춘 병원도 소록도병원과 나자로병원 정도다.”

    - 이처럼 적은 이유는?

    “우리나라의 경우 한센사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전국에 1만5000여 명밖에 없고, 평균 연령도 70세가 넘었다. 10년 정도 지나면 10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이들도 치료가 아니라 요양단계다. 길게 보면 10년, 짧게 보면 5년 정도 지나면 우리나라의 한센사업은 끝날 것 같다.”


    바깥나들이 한 번 못한 그분들이 첫 번째로 다리를 건너시라

    | 윤정모 소설가 |


    소록도에 다리가 생긴다? 그것도 차가 아닌 사람부터 왕래케 한다? 사실 육지와의 거리는 600m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수용 환자들에겐 지상에서 가장 먼 섬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 하여 불귀(不歸)의 유형지로도 불렸던 곳인데, 이제는 자기 발로 걸어 나올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다리가 설치된 지점이 검문소였고, 허가 없이는 누구도 육지로 가는 배를 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다 목숨을 잃었던가. 멀고 먼 나르도까지 맨몸으로 헤엄쳐 가다 익사한 사람들은 또 얼마던가.

    소록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며 울창한 송림, 은모래 해변, 따뜻한 기후 등이 요양지로 최적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환자들은 요양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일제는 나환자 격리정책에 따라 1916년 섬 전체를 갱생원으로 지정한 뒤 조선 팔도 전국에서 나환자 강제이송을 시작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의 모든 나환자를 한곳에 쓸어모아 영원히 격리시킨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레프라(Lepra)균을 발견한 한센(Hansen Armauer)에 경도된 의학자들이 조선인 나환자들의 생체실험을 통해 의약품을 발명한 뒤 일본의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진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전국에 걸쳐 나환자를 색출하거나 강제 이송, 영원한 격리를 꾀한 것은 사실이었고, 인체실험을 당한 환자도 많았다. 그리고 남성들에게 행한 단종수술(斷種手術)은 일본인 나환자들에겐 없었던 일이다.

    강제 이송된 이들은 6개 마을로 나뉘어 자신들이 머물 집을 스스로 지어야 했다. 도로와 편의시설, 공원 조경까지 환자들 손으로 이뤄졌고, 이 혹독한 중노동은 겨울에도 계속됐다. 이때 원생 3분의 2가 동상에 걸렸으며, 상태가 심한 사람들은 손 발목을 절단해야 했다.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강제노역은 멈추지 않았으니, 장애인이 그렇게 많았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학대와 수모, 편견과 슬픔으로 얼룩졌던 소록도, 역사 거의 한 세기 만에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열렸다. 입원 뒤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일이 없다는 노인들, 그분들 마음은 어떨까?

    바라건대 다리를 건너는 첫 행보자는 그분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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