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3

2017.01.25

특집 | 설의 두 가지 표정

못 가서 사무치고, 가기 싫어 짜증나고

“명절 근무는 어쩔 수 없는 숙명” vs “상처받느니 피하고 싶다”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7-01-23 18: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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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세배와 덕담으로 새해를 맞는 설날 아침 풍경은 누가 봐도 이상적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설 명절이 반가운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직업적 특성상, 혹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많다. 반대로 정신적  ·  육체적 스트레스가 두려워 명절 자체를 원천봉쇄하려는 이도 점점 느는 추세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명절의 두 얼굴을 엿봤다. <편집자 주>

    설 못 가는 사람들

    “(명절 연휴에) 일하느라 고향에 못 간 해를 세는 것보다 명절 때 고향에 가본 횟수를 세는 게 더 빠를 겁니다.”

    20년째 지하철 기관사로 일하는 장성용(48) 씨의 말이다. 장씨처럼 명절 연휴에도 근무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지하철 기관사 외에도 경찰, 응급실 당직 의사 등 국민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명절에도 묵묵히 일터를 지킨다. 그 밖에도 생업이라, 혹은 회사 사정이 안 좋아 귀향은커녕 연휴를 반납해야 하는 이도 부지기수다.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명절과 상관없이 연중무휴 달린다. 그렇기에 운전직 종사자는 대부분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한다. 장씨는 “지하철 기관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명절 귀향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명절 전후로 휴가를 내 고향에 내려가는데, 그때는 명절이 아니니 외지에 사는 친척은 거의 볼 수 없어 아쉽다”고 밝혔다.

    명절 때마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추석 때 텅 빈 지하철을 운행하다 철교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며 착잡한 심경이 들었다는 장씨는 “가족, 특히 부모 얼굴이 떠올라 울컥했다”고 털어놓았다.


    사명감으로 명절 잊는 사람들




    버스기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20년째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정모(48) 씨는 “시내버스기사는 당번제로 명절에 일할 사람을 정한다. 매번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절 운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유모(50) 씨 역시 명절이 대목이라 쉴 틈이 없다. 유씨는 “최근 조카 결혼식에 온 가족이 참석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명절 때 사촌형제들과 어울린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친척들이 모인 자리를 불편해하더라. 아빠의 직업 때문에 아이들이 사촌형제들과 우애를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했다. 

    명절 연휴와 상관없이 치안을 책임져야 하는 경찰 역시 명절이 고달픈 직업군이다. 문광득(32) 서울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경사는 이번 명절에도 당직이 걸려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다. 문 경사는 “경찰 생활 7년간 차례를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 운이 좋으면 하루나 이틀 정도 쉴 수는 있지만 고향이 경북 안동이라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경찰에 입문한 노지현(27) 순경도 처음 맞는 명절을 경찰서에서 보내게 됐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그는 “명절에 부모를 뵙지 못하는 게 못내 서운하지만, 이 역시 경찰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명절이라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럴 때 삶을 비관해 마포대교를 찾는 사람들이 있고, 가정폭력 신고도 증가한다”고 밝혔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에게도 귀향은 언감생심이다. 김민정 연세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 의사는 연휴 기간에도 하루나 이틀 빼고 거의 근무가 잡혀 있다. 연휴를 맞아 고향을 찾거나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나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병원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나흘 연휴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직업군도 있다. 바로 24시간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편의점의 점주다. 서울 동대문에서 5년째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모(56) 씨는 “편의점 일을 시작하고 단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명절에는 아르바이트생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점주가 새벽까지 계산대를 지킬 수밖에 없다. 명절에는 손님이 많지도 않은데 문은 계속 열어둬야 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했다. 

    이들이 명절에도 영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본사와 계약 때문이다. 현재 국내 주요 편의점 3사(CU, GS25, 세븐일레븐)는 가맹거래계약 조건을 바탕으로 명절 기간에도 24시간 영업을 고수하고 있다. 만약 가맹점주가 무단으로 문을 닫고 영업하지 않으면 본사는 시정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서를 보낸다.

    편의점뿐 아니라 일반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도 연휴 기간 하루나 이틀밖에 쉬지 못해 귀향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서울 강남구 한 드러그스토어에서 일하는 이모(28·여) 씨는 “취업 후 2년 동안 단 한 번도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했다. 남들 쉴 때 못 쉬다 보니 일반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많이 부럽다”고 말했다. 

    경기 고양시 한 가전제품 매장에서 일하는 박모(31) 씨도 취업 후 명절을 쇠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박씨는 “매장은 평일보다 주말에 손님이 더 많고 바쁘다. 특히 명절 연휴는 대목 중 대목이다. 가끔 설을 맞아 입학·졸업 선물을 사러 온 가족을 보면 고향에 계신 부모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택배업계도 명절은 선물 배달이 많아 오히려 평소보다 바쁜 기간이다. 택배 집하장에서 일하는 정모(35) 씨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명절 연휴가 반갑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명절은 만나고 싶지 않은 지옥이다. 택배 물량이 30~40%가량 늘어나니 명절이 있는 달에는 휴가를 쓰는 것도 어렵다”고 탄식했다.



    대목 장사 포기할 수 없어

    명절 연휴에 택시를 운행하는 기사는 월 할당액을 채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택시기사 강모(48) 씨는 벌써 2년째 월 할당액을 못 채워 명절 때마다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강씨는 “밤 승객은 할증에 장거리 손님도 많아 택시기사의 주 수입원이다. 그런데 최근 경기가 나빠 술자리가 없으니 밤에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승객이 많이 줄었다. 명절이 있는 달은 고향에 가는 인파 때문에 그나마 있던 승객이 더 줄어들어 할당액을 채우기가 힘들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명절, 연휴, 휴일 할 것 없이 택시를 운전한다”고 밝혔다. 

    수입 때문에 일터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있다. PC방 업주도 명절 연휴와 상관없이 영업을 이어간다. 서울 관악구에서 3년째 PC방을 운영하는 최모(37) 씨는 “PC방은 이맘때가 대목이다. 온라인 게임업체에서 연휴를 맞아 게임 아이템을 주는 등 각종 이벤트를 하기 때문에 게임을 즐기는 인구가 일시적으로 확 늘어난다. 돈을 벌려면 명절 장사를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경기 수원시에서 5년째 PC방을 운영 중인 양모(40) 씨도 명절에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 양씨는 “최근 경기가 나쁘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늘면서 PC방을 찾는 손님이 많이 줄었다. 지난달에도 겨우 적자를 면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휴일보다 매출이 2~3배 많은 명절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대목이다. 고향 어른들 생각하면 가게 문을 닫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만 먹고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게 또 어디 있나”라고 반문했다.



    설 안 가는 사람들

    이처럼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명절을 ‘회피’하는 이도 늘고 있다. 교통지옥, 차례상 준비, 세뱃돈 부담, 가시 있는 덕담 등 설날이 싫은 이유도 제각각이다.

    설 연휴를 열흘 앞둔 1월 17일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 제3자율학습실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제3자율학습실은 노트북컴퓨터 사용이 가능해 온라인 강의를 듣는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과 취업준비생(취준생)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취업난에 취준생의 명절 기피 심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공기업 입사를 목표로 공부 중이라는 김모(29) 씨는 지난 추석 때부터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지 않고 있다. 지난해 설날 고향에 갔다 자신의 취업을 걱정하는 친척들의 말이 못내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요즘 취업난이 심각하다는 건 누구나 알아서 대놓고 취업 못 한다고 나무라지는 않지만,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명절 때 공부를 더 하거나, 아니면 자취방에서 잠시 뒹굴뒹굴하며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말했다.   



    취준생  ·  싱글족, “잔소리 듣기 싫어”



    로스쿨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이모(28) 씨도 설날이 반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몇 달 전까지 7급 공무원이던 그는 지방직이 아닌 국가직이라 지방 발령이 잦다는 점 때문에 과감히 공무원을 그만두고 법조계로 진로를 바꿨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다시 수험생이 되다 보니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기가 왠지 떳떳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남들 다 부러워하는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무슨 또 공부냐’라는 말을 들을 게 빤해서 이번 설에는 큰집에 안 갈 생각이다. 스터디모임을 함께 하는 친구 중에는 벌써 몇 년째 명절을 잊고 사는 사람도 있다. 수험생에게 명절 연휴는 사치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서모(46) 씨는 “명절을 앞두고 벌써 스트레스가 몰려와 책이나 볼 겸 도서관을 찾았다”고 밝혔다. 결혼 적령기가 지났지만 아직 싱글인 그를 두고 친척 어른들의 잔소리가 날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씨는 “어려서부터 4대가 한집에 모여 사는 대가족이라 친척들의 관심이 유별나다. 명절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도 지겹고, 나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하니 이런 소모전이 어디 있나. 그래서 요즘은 명절이 아닌 어른들 생신 때 잠깐 가서 식사만 하고 오는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가족과 친척의 잔소리, 질문 공세에서 벗어나려고 고향행을 피하는 사람도 적잖다. 취준생이나 싱글 남녀에게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일종의 ‘낭비’로 느껴지기도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득이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서울 신림 고시촌에서 2년 넘게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최모(28) 씨는 “고시원비가 아까워서라도 고향에 갈 수 없다”고 밝혔다. 최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 매달 7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부쳐주시는 부모를 생각하면 잠시라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된다. 학교 다닐 때야 학생이니까 그렇다 쳐도, 지금은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이다 보니 부모에게 손 벌리는 게 죄송스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세뱃돈이 부담스럽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인천 부평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김모(41) 씨는 언제부턴가 조카들에게 주는 세뱃돈이 부담스러워졌다고 토로한다. 조카들이 자랄수록 기대하는 금액도 커져 명절마다 목돈이 나가기 때문이다. 김씨는 “조카가 7명인데 세뱃돈뿐 아니라 그해 새로 입학하는 아이가 있으면 특별용돈까지 줘야 해 지출이 만만치 않다. 어디 설뿐인가.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생일 등 조카들의 용돈을 챙기느라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다. 이번 설에는 형제들에게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내 반려견에게 간식이라도 선물해달라’고 요구했다(웃음).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설날 아침에는 세배만 하고 바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친척 어른들에게 ‘왜 아직 결혼 안 하니’ ‘눈이 높은 거 아니니’ 같은 얘기를 듣느니 차라리 홀가분하게 어디론가 떠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직장인, 기혼자도 명절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로 범벅된 쳇바퀴 같은 일상에 치여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탈진증후군)’에 빠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운 좋게 취업했지만 반복되는 야근, 고강도의 업무 스트레스를 이겨내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 중에는 “명절 연휴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푹 쉬겠다”고 선언하는 이가 적잖다. 그리고 이들은 연휴 기간 커피숍, 도서관 등 각자의 ‘도피처’를 마련할 계획이다.   


    명절 회피 부채질 ‘번아웃 신드롬’



    “먼저 잠을 푹 자고, 나머지 시간은 커피숍에서 평소 읽고 싶던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보낼 거예요. 음악도 실컷 듣고 그동안 못 본 드라마도 다 몰아서 볼 계획이에요.”

    중소기업 입사 1년 차인 최모(30) 씨의 말이다. 수원에 있는 큰집에도 가지 않을 생각이라는 그는 “부모에게는 죄송하지만 명절 연휴가 아니면 제대로 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다른 걸로 효도할 테니 이번만큼은 자유시간을 달라고 특별히 부탁드렸다”고 밝혔다.

    한편 조금은 왁자지껄한 휴식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다.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김모(32) 씨는 나흘 연휴 동안 설날 당일만 빼고 나머지 사흘은 다 약속을 잡았다. “지방에서 혼자 생활해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그는 “가족도 좋지만 친구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로가 따로 있어 이번 명절에는 친구들과 마음껏 수다를 떨며 회포를 풀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 한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직장인 박모(28) 씨는 이번 명절 연휴를 이용해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계획이다. “첫 직장인 데다 신경 쓸 일이 많아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는 그는 “평소 취미인 요가를 하면서 조용히 새해를 맞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젊은 층이 ‘연휴 도피’를 꾀하자 유명 브랜드 커피숍은 대부분 설 연휴 문을 열 계획이다. 서울 마포구의 한 커피숍 가맹점주는 “명절 때 편안하게 오랫동안 앉아 있을 곳을 찾는 젊은 층 수요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번 연휴에는 설날 당일에도 문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내 학원들도 적극적으로 ‘명절 대피소’를 제공한다. 국내 유명 프랜차이즈 어학원은 2년 전부터 연휴 기간 내내 학원 내 강의실과 스터디룸 등을 전격 개방하고 있다. 이 학원 관계자는 “수강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구든 방문해 공부할 수 있으며, 방문자에게는 빵, 음료 등 간단한 간식도 제공한다. 지난 추석에는 1000명 가까이 학원을 찾았고, 올해도 그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가족의 귀향길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는 명절을 회피할 명분이 마땅치 않은 게 사실이다. 부산이 고향인 직장인 최모(52) 씨는 올해도 10시간 가까이 운전대를 잡을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명절 때마다 거쳐야 하는 교통지옥 탓에 연휴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몸살에 시달린다. 특히 올해는 내심 기대한 승진에서도 미끄러져 고향 가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뭐 하나 좋을 것 없는 요즘 같은 시국에 승진은 물 건너가고, 회사 사정이 나빠 보너스까지 줄어들어 아내를 볼 면목이 없다. 부모 용돈에 조카들 세뱃돈까지 챙기면 남는 게 거의 없을 듯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이래저래 명절 기분이 안 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녀가 대학 입시에 실패한 경우도 명절이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며느리에게 아이의 대입 실패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작용할 게 빤하다. 특히 올해는 설 연휴 후에나 당락이 결정되는 학교가 많아 아이의 정시모집 준비를 이유로 시댁에 가지 않는 며느리가 꽤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주부 김모(52) 씨는 남편과 막내아들만 고향에 가고 자신과 큰딸은 집에 있을 생각이다. 김씨는 “수험생을 둔 집 치고 명절을 다 챙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공부가 유세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이 인생에서 지금처럼 중요한 때가 또 얼마나 있겠나. 나 역시 이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뭐라도 결정이 돼야 떳떳한 마음으로 어른들을 찾아뵙고 친척에게 자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 사이에서는 ‘명절 건너뛰기’가 무용담처럼 회자되곤 한다. “일 때문에”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잡지 에디터인 강모(33) 씨는 “명절이 마감 날짜와 겹치는지, 아닌지에 따라 며느리로서 운명도 갈린다”고 말했다. 강씨는 “매달 15일이 잡지 마감일인데, 마감 전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명절이 끼면 거의 쉬지 못한다. 이 경우 신혼 초에는 시부모 눈치가 보이고 남들 쉴 때 일하는 것도 불만이었는데, 요즘은 솔직히 명절에 일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싱글인 친구들은 마감이 아닌데도 일 핑계대고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밝혔다.  


    관계의 소중함 잊지 말아야



    며느리만 시댁에 가는 게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요즘에는 사위와 장인·장모의 갈등으로 처갓집에 가는 걸 최소화하려는 남성도 많다. 결혼 8년 차인 직장인 박모(42) 씨는 “맞벌이하는 아내를 대신해 지금까지 장모가 아이 양육을 책임지다 보니 장인·장모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늘 편치 않다”고 말한다. 박씨는 “특히 장모님이 사위인 내가 부족해 딸이 고생한다는 투로 자주 말씀하셔서 처갓집에 다녀오면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된다. 이번 명절은 부디 조용히 넘어가길 바란다”고 푸념했다.

    결국 명절을 피하고자 몸부림치는 이는 대부분 타인에게 받을 마음의 상처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약점과 치부를 서슴없이 건드리는 왜곡된 정서 탓에 명절의 그림자는 더욱 짙다. 강병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는 “명절 스트레스는 대부분 ‘관계의 소중함’을 모르는 데서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오랜 세월 쌓아올린 가족의 정이 서툰 말 한마디에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

    이어 강 원장은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취업이나 결혼 관련 문제는 대화 소재로 삼지 않는 게 예의다. 군사독재 시절 어른이 아이들 앞에서 정치 얘기를 삼간 것과 같다. 기성세대가 누리던 풍요를 지금의 젊은 층은 거의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 또한 기성세대에게 있지 않나.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에는 모두가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말만 주고받는 게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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