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7

2007.08.07

인생 종착역 ‘죽음’에 대한 생각들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08-06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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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종착역 ‘죽음’에 대한 생각들

    인간이 건강과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노인종합복지회관의 건강 강좌.

    논술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해갈 수 없는 주제를 다룬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관한 문제’도 그중 하나다. 동안(童顔) 열풍이 불고 실버(silver) 산업이 번성할 것이라는 전망에서 우리는 반대로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문제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읽을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그림에 가두려는 열망에 휩싸인다. 극작가 브레히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이미지가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지만, 도리언 그레이는 자연현상(늙어감)을 (사진)기술로 막으려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단 한 가지는 ‘늙어가고 죽는 것의 필연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노인이 젊은이들보다 더 삶을 사랑한다고 주장한다.

    불로장생 집착한 진시황, 죽음에 초연한 노자

    당연히 행복의 가장 막강한 적은 죽음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죽음)’를 이겨내기 위해 미래를 현재화한다. 마치 과거의 기억이 ‘추억’이라는 형식으로 현재와 함께하듯, 미래(죽음)를 ‘현재’로 다스리기 위해 ‘죽음 이후의 천국’을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내세 기복신앙의 탄생이다. 이는 인간이 종교적 동물인 까닭이다.

    하지만 말년에 불로장생 약을 찾아 온 세상을 뒤진 진시황과 한무제(漢武帝)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절대 권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은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실존현상인 것이다. 또한 누구도 죽어가는 사람의 내적 체험을 알 수 없다.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절대슬픔도 죽는 당사자의 죽음에 대한 공포나 슬픔보다는 클 수 없을 것이다.



    박완서는 소설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자식이 어미보다 일찍 죽는 참척(慘慽)으로 죽음이 얼마나 두렵고 슬프고 끔찍한 사건인지 보여준다. 심지어 꽃다운 나이에 먼저 죽은 아들 앞에 선 어미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원태야, 원태야, 우리 원태야,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플라톤은 “철학 함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 했고, 스피노자는 “철학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명상”이라고 했다. 죽음은 선험적 경험이 불가능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히려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철학적 깨달음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했던 공자의 말과 상통한다.

    노자(老子)에게 죽음은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자연으로부터의’ 생명 탄생처럼 ‘자연으로의’ 죽음 또한 자연의 도리이므로 그것을 따르면 기쁨이나 슬픔 따위의 감정이 낄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노자 사상을 이어받은 장자 또한 그렇다. 장자는 아내가 죽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이런 그를 타박하는 혜자에게 장자는, 죽음은 춘하추동의 되풀이처럼 자연의 운행과 같다며 아내는 ‘천지(天地)’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웠기에 울고불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곡을 하는 게 오히려 ‘하늘의 운명(자연의 섭리)을 모르는 것’이라고 혜자에게 한 수 가르친 것이다.

    “장자가 대답했다.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춘하추동이 되풀이하여 운행함과 같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한다면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哭)을 그쳤단 말이오.”

    앞서 나온 진시황이나 한무제의 예처럼 ‘노장사상-도교(道敎)’를 장생불로술(長生不老術)로 이해하고 섭생기술 연마에만 열을 올린 천박스러움과 달리, 인생에 대한 관조와 통찰에서 나오는 의연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박완서 소설 속 어머니가 노자와 장자를 읽으면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스승(소크라테스)의 말을 전한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도 죽음을 긍정적으로 봤다.

    “오오 심미아스, 참철인(哲人)은 늘 죽는 일에 마음을 쓰고, 따라서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덜 무서워하는 자일세. 그런 곳으로 떠나려 할 즈음에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떨고 싫어하는 것처럼 모순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거기에 가면 지상에서 사랑하던 이나 아내, 자식을 만나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는 희망에서 죽기를 원했던 것이 사실이야. 그렇다면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이로서, 그리고 저 하데스에서만 지혜를 보람 있게 향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싫어하겠는가?”

    이는 장자의 죽음관과 엇비슷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죽은 뒤에 ‘새로운’ 개체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고 보았다. 죽음은 ‘자연에서 자연으로(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즉 자연의 섭리일 뿐이라는 장자의 죽음관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럼 영화 ‘시 인사이드’(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에서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주인공 라몬이 자유의지로 택한 안락사는 누구의 죽음관과 비슷할까. 안락사는 자연사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유의지가 선택한 것이므로 아무래도 자유를 위해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의 죽음 인식이 깃든 영화가 아닐까.

    “죽음 피할 수 없다면 사는 동안 삶을 즐겨라”

    이렇듯 죽음에 초연한 태도(소크라테스, 장자), 불로장생 집착(진시황), 철학적인 죽음(플라톤, 스피노자), 안락사, 예수의 죽음 등 개인의 삶이 다양한 만큼 죽음에 대한 인식도 여러 가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유한한 존재에게 죽음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육체나 순간적 쾌락, 그것에 대한 환상에 열 올리는 ‘동안열풍’ ‘생명공학 신드롬’이 사이비 도교의 장생불로술의 천박스러움과 닮았다면, 죽음이란 거울을 응시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꿈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관과 죽음도 자연의 질서로 파악한 장자의 생각이 우리의 삶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투시경이지 않을까.

    가장 오래된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길가메시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유일하게 죽지 않는 인간 ‘우트나피시팀’을 찾아나섰는데, 여인 ‘시두리’의 말로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시두리는 신들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다고 한다. 때문에 그녀는 신이 아닌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사는 동안 삶을 즐기라고 한다. 필멸을 이기는 것은 당당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유한한 삶을 ‘유한하게’ 즐기라는 패러독스다.

    단지 시두리의 메시지가 육체적, 이기적 쾌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걸 이해한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희생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긴 마더 테레사나 닥터 노먼 베순 같은 이들은 원래 쾌락주의와 이타주의는 같은 뿌리(죽음에 대한 낙관)에서 자란 한 그루의 나무라는 걸 알게 해준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즐겨야 할까? 살면서 늘 불현듯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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