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3

..

자갈땅 미네랄 흡수한 ‘자연의 맛’

  • 조정용 아트옥션 대표·고려대 강사

    입력2007-07-09 10: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자갈땅 미네랄 흡수한 ‘자연의 맛’

    소설 속의 주인공, 브라네르 1934.

    빈티지만 좋으면 무슨 와인이든 이름을 다 맞힐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식도락가가 있다. 와인에 대한 소양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속물 근성의 캐릭터다. 또 이 식도락가의 입맛을 사로잡을 귀한 와인을 무진장 저장하고 있는 컬렉터가 있다. 그는 고급 와인을 가진 것만으로는 모자라 그걸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와인 알아맞히기 내기를 한다. 컬렉터가 라벨을 감추고 내놓는 와인의 이름을 식도락가가 맞히는 것이다. 그 전에 몇 차례 있었던 내기에서는 매번 식도락가가 이겼다. 이번에도 식도락가는 와인 전문가답게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며 와인 이름을 찾아간다. 귀납적 추론을 통해 범위를 좁혀가는 방식이 그의 장기다.

    보르도를 확신하면서 생줄리앙으로 좁히는 장면, 광채가 나지 않으니 등급이 낮은 와인일 것이라며 4등급으로 구체화하는 장면, ‘베슈벨도 아니고 탈보도 아니라면 브라네르 뒤크뤼(Ch?teau Branaire Ducru)’라고 확언하는 장면 등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다.

    농익은 포도 얻기 위해 소출 줄이고, 오크배럴 사용 절제

    마침내 식도락가는 제공된 와인이 생줄리앙 마을의 브라네르이며, 빈티지는 1934년이란 결론에 이른다. 그는 “어서 병을 돌려 라벨을 보이시오”라며 결과를 확인하려 한다. 순간 컬렉터의 하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식도락가에게 안경을 내민다. 식도락가가 와인이 보관돼 있던 컬렉터의 서재에 놓고 미처 챙기지 못한 소지품이었다. 그것은 그가 서재에 들어가 이미 와인병을 봤음을 암시하는 단서다.



    이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소설 ‘맛’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에 등장하는 브라네르는 보르도 생줄리앙 마을의 아담한 샤토(원래 뜻은 ‘성’이지만 포도 농장을 지칭)다. 이곳은 지롱드 강에 연한 베슈벨과 내륙에 떨어져 있는 탈보 사이에 자리한다. 포도밭은 카베르네 소비뇽 위주로 경작되는데 메를로와 프티 베르도도 재배한다.

    나는 해마다 봄이 되면 보르도 지역을 여행하는데, 어느 날 브라네르에 머물고 있었다. 제대로 숙성된 1949년 빈티지를 맛보고는 모두 보르도 와인 특히 생줄리앙의 숙성력을 실감할 때, 난 로알드 달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래서 성주에게 ‘소설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곧 나는 한밤중에 깜깜한 지하 와인 저장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수많은 와인병 속에서 1934년 빈티지를 꺼내던 순간의 황홀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생줄리앙 중에서도 브라네르는 맛과 질감에 개성이 있다. 진하고 걸쭉하고 단내가 많이 나야 인기 있는 와인 세상에서 브라네르는 좀 다르다. 그 주인장은 심지 곧은 전략가다. 와인은 그를 닮아 풍성한 질감 속에 뚜렷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 덜 진하고 덜 걸쭉할지언정 와인의 골격은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믿는다. 꼿꼿한 대나무 심지가 잔에 박혀 있는 느낌이랄까.

    샤토 브라네르의 주인 파트리크 마로토(Patrick Maroteaux)는 한때 은행원이었고, 사업가로 변신해 브라네르를 구입했다. 그는 품질 개량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줄기차게 노력한 결과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탈보나 베슈벨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숙성력 때문이다.

    결국 맛의 비밀은 얼마나 오랫동안 맛과 향을 지니느냐에 달렸다. 그는 농익은 포도를 얻기 위해 소출을 줄이고, 양조장에서는 오크 배럴 사용을 절제해 자연스러운 와인이 만들어지게 한다. 생줄리앙의 자갈 토양의 미네랄을 잔뜩 흡수한 브라네르는 맛의 화신이 되어 오늘날 마니아의 셀러 속에서 숙성되고 있다.



    댓글 0
    닫기